악(뱀)에 대항하는 새로운 공동체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이 ‘미쳤다’ 여기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군집(공동체)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예수님의 공동체를 와해시키려고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몰아세우고 있다. 여기에 대항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라짐이 없는 새로운 공동체가 필요함을 역설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공동체는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공동체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어머니가 되어주고, 형제요 누이가 되어주는 공동체다. 새로운 공동체의 선언은 인류 최초의 공동체가 이루지 못한 일을 요구하는 것이다.
1독서 창세 3,9-15 창조 때 인류 최초의 가정(공동체)은 서로에게 협력자가 되어주는 공동체를 지향했다(창세 2,20 참조).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어색해지고 말았다(창세 3,3 참조). 인류 최초의 가정도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불완전한 상태로 출발하였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는 공동체를 갈라서게 만드는 죄를 범하게 한다. 그 죄로 인해서 사람은 에덴에서 추방되었다.
인류 최초의 공동체인 아담과 하와는 서로가 자신의 실수로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지 않았다. 아담은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며,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라고 핑계를 댄다. 아담은 죄의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며 말하고 있지만, 속뜻은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여자 때문에 죄를 지었으니 잘못의 근원은 하느님께 있다는 논리이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탓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 인간이다. 하느님은 아담과 논쟁(더 이상 묻고 따지지 않고)하지 않고 아담의 변명을 그냥 받아들이신다. 사람들 간의 갈등 구조와 아주 다르게 반응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
이어서 하느님께서는 하와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창세 3,13) 하고 물으시자, 여자도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먹었습니다.”라고 핑계를 댄다. 하느님은 여자에게도 더 이상 묻지 않으시며, 여자의 대답을 존중하신다. 인간의 추함이 아담과 하와로부터 세상에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런 일은 인간 삶에 비일비재하다.
이때 “너 어디 있느냐?”라고 아담에게 물으신 하느님의 질문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다. 창조 때 본래의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신 것이다. 왜 서로에게 협력자가 되어주지 못했냐고 질책을 하신 것이다. 우리는 자기 성찰을 통해서 이 질문의 답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인류 최초의 가정공동체는 서로에게 짐(탓)을 지운 채로, 어색한 가운데 미완의 상태로 마무리되었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속한 가정이나 사회집단 내에서 서로 남 탓을 하며 살아가는 일을 쉽게 볼 수 있다. 서로에게 탓을 지우는 행위는 마귀의 우두머리(뱀-악)에게 휘둘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마귀의 활동 목표는 사람이 하느님과 멀어지도록, 또 공동체가 갈라지도록 인간을 설득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항하는 예수님의 선포는 창조 때 본래 모습의 회복이자, 더 힘센 분으로써 미완으로 남아 있는 공동체에게 악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