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자 대림 제1주일 강론

posted Nov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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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론 이진수 스테파노 신부

깨어있건 잠들었건 ‘고엘’을 꿈꾸며 기다리는 대림 시기

오늘 이사야서 말씀 첫 소절에서 대림 시기의 핵심 키워드가 주어진다. 오시길 기다리는 분은 ‘우리의 구원자’(63,16)이다. ‘구원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고엘’은 동사 ‘가알’에서 파생된다. ‘가알’은 ‘속량하다redeem’는 의미이다. 여기서 구원Redemptio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고엘’은 별 가치도 없는 것을, 아니 부정적이기만 한 것을 굳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서 내 것으로 삼는 자이다.


구약 전통 내 설화적 인물 중 제일 대표적 ‘고엘’은 보아즈이다. 보아즈는 모압 출신 이방 여인 룻을 아내로 삼은 자이다. 나오미 남편 엘리멜렉의 아들 킬욘이 룻과의 사이에서 자식도 없이 재산도 남기지 않은 채 모압 땅에서 죽은 지 십 년이 넘게 지났다(룻 1,1-5). 이렇게 ‘돈 안 되는’ 과부를 아내로 삼는다는 것은 ‘돈 꼴아 박는’ 지름길이다. 그 사이에 자식이라도 나면, 선대의 땅도 속량해주어야 하고, 태어난 아이 조차도 고인의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남 좋은 일 시키기 위해, 고인이 남긴 빚과 미망인 및 ‘뻐꾸기 새끼’가 될 아이 부양의 의무까지 ‘자신의 것’으로 삼는 셈이다. 이러한 보아즈로부터 다윗이 온다. 다윗 가문이 속한 ‘페레츠의 족보’가 룻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4,18-22).


‘다윗의 자손’이신 우리 주님의 족보에서 보아즈를 필두로 다른 ‘고엘’들이 계속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나자렛 예수께서 진정한 ‘고엘’이시기 때문이다. 진정한 ‘고엘’은 ‘고엘’ 가문에서 온다. 주님의 양부 요셉은 인간적인 의미에서 부정적이기만 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결과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요셉의 아버지 역시 ‘고엘’일 가능성이 높다. 마태오 복음에서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이지만(1,16), 루카 복음에서는 요셉이 엘리의 아들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3,23). 야곱과 엘리는 형제이고 이 둘 중 하나는 자식 없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남은 형제가 미망인을 아내로 맞아 아들을 보고, 태어난 아들은 야곱과 엘리 둘 다를 상대로 아들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는 분은 ‘그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지는 분’(1코린 1,5)이시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장 내밀한 부분은 악의 세력도 침범할 수 없고 오로지 당신 자신의 것만으로 삼을 수 있는 곳으로 두셨다. 그렇게 우리 모두를 상대로 ‘고엘’이 되실 영원한 계획을 세우셨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내밀한 부분이 마지막까지 나 자신 홀로 고립되는 곳이 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깨어 있어라”고 거듭 당부하시는(마르 13,33-37)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잠’은 여러 가지 이유로(실망이나 좌절 또는 두려움 등) 도피처가 되고 ‘무기력’이 드러나는 장이다. 무기력으로 번역되는 lethargy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놓인 망각의 강인 ‘레테lethe’에서 온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궁극적으로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지 망각하게 될 때, ‘잠들게 된다.’ 거듭 잠들게 되더라도 다시금 깨어나야 한다. 아니, 자더라도 룻처럼 자야 한다(룻 3,6-7). 우리의 잠이 ‘고엘’을 꿈꾸고 맞이하는 또 다른 기회가 되게 그렇게 ‘자야 한다.’ 깨어있건 잠들었건 ‘고엘’을 꿈꾸며 기다리는 대림 시기 맞이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