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306
Extra Form
저자 김은정 엘리사벳 교수/경남대

김동인의 『이 잔을』은 거의 100년 전인 1923년 1월에 발표한 작품이다. 한 세기 전의 작가 김동인이 예수의 마지막 날을 재구성한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삶과 죽음의 고비에서 최후의 결단을 해야 할 순간에 처해 있다. 이 작품은 이 결단의 순간에 예수가 보여주는 인간적인 고뇌를 다룬다. 소설적인 상상력을 가미하여 재구성한 예수의 일대기는 그가 자신에게 처한 ‘죽음의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온갖 핍박과 곤란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뜻을 펼쳤으며 능히 얻을 수 있는 온갖 영광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자신의 죽음까지 요구하는 하느님에 대해 ‘야속함’을 느낀다고, 그리고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이 참혹한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한다. 이렇게 예수는 3년 동안 행한 모든 활동을 추억처럼 떠올리기도 하고 죽음을 앞에 두고서 고뇌의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작품의 마지막에 그가 내린 결단은 인간적인 모습을 중심에 두면서도 신적인 것이다. 그는 희생을 선택한다.


“산제사를 요구하는 자들에게는 제물이 있어야 한다. 언젠가 너희들에게 이야기했지,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고. 내가 빛이 되고 종소리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십자가로 가야겠다. 내한목숨을 바쳐서, 시방, 장래 할 것 없이 몇억만 사람이 구원된다 생각하면 아주 싸고 쉬운 것이다. 오히려 기뻐할 일이 아니냐?”


이렇게 신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진 결단을 통해 예수는 희생을 요구하는 민중들에게 스스로 희생당함으로써 하느님의 높은 뜻을 보여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의 번뇌가 있었기에 그의 희생은 더욱 고귀한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는 잠과 깨임이 되풀이되면서 암시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쫓아오는 제사장들을 경계하여 불침번을 서는 상황에서 ‘깨어 있어라’는 말 그대로 잠들지 말라는 뜻이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잊지 말고 이를 행하라는 뜻이다. 어둠 속에서 음모를 꾸미고 예수를 죽이려고 뒤따르는 제사장들처럼 어떤 위협에도 이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자? 잘 때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더라도 너희는 자서는 안 된다. 모든 괴로움을 무릅쓰고라도, 깊이깊이 잠든 사람들을 깨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너희의 직책이다. 잊어서는 안 된다.”


2000년 전에 예수가 했던 이 말이 100년 전의 한국의 대표 작가 김동인으로 이어지고 오늘날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우리는 갈등의 한 해를 보냈고 여전히 질병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고난을 이겨내고 새 희망을 전할 때이다. 


새해가 밝았다. 지금의 고통이 다가올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주기를 바라며 기도를 올린다. 주여, 이 참혹한 잔을 이젠 거두어 주십시오.

 

210117 5면 백그라운드(홈피용).jpg


  1. 몸은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

    Date2021.03.18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227 file
    Read More
  2. 젊은 도시 창원과 어깨를 나란히 한 반송성당

    Date2021.03.11 Category본당순례 Views931 file
    Read More
  3. 마음의 태양을 따라가는 길-김의정의 『목소리』

    Date2021.02.18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292 file
    Read More
  4. 복음, 소외된 이들을 위한 말과 밥

    Date2021.02.18 Category신학칼럼 Views364 file
    Read More
  5. 코로나가 주는 값진 교훈

    Date2021.02.18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227 file
    Read More
  6. 프란치스코 성인을 닮은 따뜻한 공동체 여좌동성당

    Date2021.02.10 Category본당순례 Views389 file
    Read More
  7.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Date2021.01.22 Category신학칼럼 Views534 file
    Read More
  8. 참혹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김동인의 『이 잔을』

    Date2021.01.15 Category문학과 신앙 Views306 file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 37 Next
/ 37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