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
2019.12.20 11:52

테라피 수녀원, 렛잇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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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우리 수녀원 살림 밑천 잼을 담당하시던 수녀님 중 한 분이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잼 관련업자와 전화 통화할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 공장 잼이죠?”,

“네? 여기 잼 공장인데요”

“거기 공장 잼 아닌가요?”

“여기 잼 공장이예요”

 

이런 식의 서로 통하지 않는 대화가 한참 오고 간 끝에 관련 물품을 받기로 하고,

수녀원(트라피스트 수녀원) 주소와 담당 수녀님 이름(래티치아)을 불러주고는 오묘한(?) 통화를 끝냈답니다.

그런 며칠 뒤 도착한 물품 주소란에는 이렇게 기재되어 있더랍니다. 

“테라피 수녀원, 렛잇비 수녀 앞” 이야기를 들은 수녀들 모두 박장대소하였고,

가끔 그 이야기가 나올 때면 마치 처음 듣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곤 하였는데,

그 ‘테라피’와 ‘렛잇비’라는 말이 계속 제 안에 어떤 울림을 남겨 놓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27명의 수녀를 이 수정 산자락으로 불러 모으신 것은 살아가면서 받을 수밖에 없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당신 사랑으로 치유하시며 온전히 새로운 사람, 당신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 아닌가?’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서 할 일이 있다면 그분의 영원한 사랑의 초대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것, 그것뿐 아닌가?’

‘그렇다면 이곳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테라피 수녀원이고, 우리 모두는 렛잇비 수녀들이지 않은가?’…

대화를 나누는데 뭔가 부자연스러운 그런 분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우리 수녀원과 수녀들의 정체성의 일면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기막힌 말이었습니다.

 

영원으로부터 계신 하느님, 그분의 사랑이 900여 년 전 프랑스 ‘시토’라는 황야에 ‘새 수도원’이라 불리던 수도원 창립을 시작하게 했고,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100여 년 전 일본 북해도에 남자, 여자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32년 전 1987년에는 대한민국 수정에

또 하나의 트라피스트 여자 수도원을 탄생시켰습니다.

전적으로 관상에 질서 지워진 수도승원으로, 성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에 따라 수도원 울타리 안에서 고독과 침묵,

끊임없는 기도와 기쁨에 찬 회개 안에서 수도승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존엄하신 하느님께 겸허하고 고귀한 봉사를 드리는(회헌 제2조)

이 광야에로 우리 모두를 끌어들이신 하느님, 그분의 사랑!

 

어제도, 오늘도 매일 새로운 나날을 펼쳐주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바람을 속삭이는 저희 수련실 자매의 글을 함께 나누며,

당신을 ‘깨어’ 기다리기를 간곡히 호소하시는 주님 마음의 고동소리를  호흡하는 카이로스 시기 되시길 빕니다.

 

“풀베기를 할 때에는 마음에 돋아난 거칢을 제거해 주시길, 잼 병을 하나씩 옮기며 상처 난 한 영혼을 위해, 잼 상자 간지를 끼울 때마다

연옥 영혼을 위해, 별안간 화를 내시는 수녀님을 대하고 나서는 학대 받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해, 오해를 받았다고 느낄 때에는

불의한 평가나 판결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무덤을 지날 때나 식물을 가꾸거나 죽은 동물을 묻어 줄 때는 임종하는 이들을 위해,

계단 손잡이 봉을 닦을 때 봉 하나에 하느님 자비 하나를 청하며, 묵주 매듭알 하나를 지을 때마다 세상에 평화 하나,

수련실 일을 할 때에는 언젠가 수련실 빈 책상에 앉게 될 성소자들을 위해,

주방 일이나 화장실 청소를 할 때는 우리 수녀님들의 건강을 위해 등등.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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