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순례
2020.01.31 13:14

부활 감수성 월영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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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영’은 달그림자라는 뜻이다.

신라시대 때 격문을 써서 적을 퇴치한 당대 최고의 문필가 최치원이 유랑생활을 하다 말년에 머문 곳이 월영대이고 월영동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뛰어난 문장가이자 사상가였던 그는 신분의 벽을 넘기 위해 유학을 다녀왔으나 신분제도의 아성에 막혀 좌절하고 만다.

그의 비애와 천재성이 응집해 승화된 이름 월영,

그래서인지 월영 신자들은 저마다의 본성에 월영이라는 의미가 유입되면서 신앙의 감수성이 촉발한 것이다.

 

통일의 상징, 성모자상
성당 마당을 들어서면 정면에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한 성모자상이 우리를 맞이한다.

북한 황해도의 화강석으로 만든 성모자상은 높이 160cm 규모로 성모마리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좌상이다.

예사로 보면 그저 그러려니 하겠지만, 설치 과정을 알고 보면 매우 의미가 깊다.

이 조각상은 월영성당 교우이자 경남대 교수인 임형준 형제가 평양미술대학 출신 조각가들과 공동으로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종교적 조형물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워 성모자상이 아닌 모자상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 작가에게 성모자상을 제작하자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금은 북한에서 제작하고 남한에 설치되었다는 그 자체만의 의미에 머물러 있지만.

남북이 하나 되는 그날이 오면 일치의 상징물로 전국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살아서 바라보시는 주님
대성전의 십자고상은 황금색이다.

황금 십자고상은 옆구리에 상처가 없다. 옆구리의 상처는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셨다는 상징이며 가장 잔인한 폭력으로 연상되기도 한다.

그 상처를 새기지 않았다. 당시 사제는 작가에게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표현해 달라”고 주문하였다.

그리하여 옆구리의 상처를 새기지 않고 고상에 황금을 입혔다.

청빈을 내세우는 교회의 정신에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우리에게 빛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한 분, 전지전능하시고 삼위일체이신 예수님을 최고로 섬기고 싶은 마음에서 황금 십자가상을 바쳤다.

좌우 유리창의 스테인드글라스도 이와 연결하였다.

오른쪽으로는 새벽을 상징하는 푸른색을, 왼쪽은 해질녘의 노을을 담았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이다.

 

성전건립 때 드러난 일치의 기적
성전건립이 확정되자 전 신자가 양파를 캐러 간 적이 있었다.

종일 양파를 캐주고 받은 일당 3만원씩을 성전건립에 보태고 녹용엑기스도 팔러 다녔다.
공동체 안에서도 차별은 존재하고 그 차별은 끊임없이 배척과 배제를 낳으며 분열을 조장한다.

개인이 느끼는 차별이 가정공동체를 넘어 구성원에게까지 미치면 예수님과의 관계도 불편해지고 인간관계도 이와 같이 되어버린다.

성전건립은 이런 악습을 돌파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살면서 한 번도 머리를 조아릴 일이 없다가 녹용을 팔기위해 남편의 직장동료를 찾아가 굽실거리고 뙤약볕에 쪼그리고 앉아 종일 양파를 캤다.

환대만 받아오다 박대를 받아보고 심한 노동으로 온몸이 욱신거렸다.

예수님만 아니면 이 고생을 할 이유가 없노라고 투덜거릴 만도 하련만, 편하게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자성自省했다.

그리고 발설하지 않았다. 하나의 불평은 모두의 불평이고 하나의 찬사도 모두에게 해당되기에 끓어오르는 말들을 곰삭혔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건립기금을 대출 내거나 먼저 약정을 해 놓고 차차 갚아 나갔다.

이로 인해 신자들은 빚이 있지만 성당은 빚 하나 남기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바로 주님의 나라에 주님의 백성이 사는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성령이 사제의 몸을 통해 우리를 움직였고 우리는 그것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이것이 일치가 아닐까. 일치는 빠르게 번지며 신자들을 독려하였다.

 

부활에 기초한 월영성당
1998년 1월 월남동성당에서 분가했을 때의 명칭은 해운동성당이었다.

초대주임은 유영봉 야고보 몬시뇰이었고, 주보성인은 성 야고보 사도이다.

시민버스 차고를 개조하여 샌드위치 패널로 지은 가건물에서 임시성전 생활을 해야 했다.
주소는 해운동이지만 월영동이란 이미지가 큰 이곳은 성당의 명칭으로 인한 혼란이 많이 생겨,

신자들에게 설문을 조사한 후에 2004년 9월 ‘월영성당’으로 변경했다.

대신 성당 명칭에서 ‘동’이란 글자는 빼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 7월 노영환 마티아 신부님 때 지금의 건물로 신축하면서 가건물의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바다가 매립되면서 땅이 생기고 그곳에 수천 세대의 아파트가 운집한 가운데 들어선 월영성당을 두고

흑자는 뜨내기들의 집합소 혹은 정체성이 없다고도 했다.

현대사회는 뜨내기가 중심세상이다.

직장 따라 환경 따라 떠돌다보면 끼리끼리 모이고 끼리끼리가 새로운 문화를 주도해 가면서 토착한다.

월영의 정체성은 ‘없는 것이 정체성’이다.

성인의 유해도 성전이 들어설만한 유래도 최초란 수식어도 없지만, 없기 때문에 언제나 항상 시작이 가능하다.

바다가 땅이 되고 그 땅 위에 세워진 성전처럼, 없음에서 있음으로 이어가는 것이 월영이고 그 중심은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이 신앙의 근간이라면 부활은 삶의 방향이고 그 삶은 밝고 활기차야 한다는 본당 사제의 말이 이제는 월영의 이미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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