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0.06.26 11:00

니는 무슨 빽 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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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힘들고 절망에 빠져서 하느님을 더욱더 다급히 외칠 때면 영일이가 생각난다. 대학에서 만난 첫 남자사람 친구이다. 키는 180㎝가 넘어 멀대같이 크고, 삐삐 말라 멀리서 보면 휘적휘적 걸어오는 모습이 흡사 길거리에 나부끼는 바람 인형 같았다. 막내여서 그런지 항상 어리광을 부리고, 변덕이 심했으며 삐지기도 잘하는 친구라 항상 지켜봐 줘야 했다. 그때 나는 적당히 오만하고 적당히 겸손해지려 애쓰는 그런 치기 어린 대학생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내가 아주 당당해 보였나 보다. 어느 봄밤에 우리는 학교 옥상에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세상은 고요하고 별은 많았으며 누군가가 지켜주는 안전함에 평화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뜬금없이 고요를 깨는 그의 한마디! “넌 어째서 그렇게 당당하냐?” 당황스러웠다. 난 당당하지 않고 수줍음도 많으며 못생겼고 키도 작고……. 이것저것 단점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횡설수설하며 허둥대는 나를 빤히 보더니 “그래도 넌 당당해. 당당해 보여. 니는 무슨 빽 있노?” 낮은 목소리로 되묻는 그를 보며 마음이 가라앉았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내 입에선 “하느님 덕분이지”라는 말이 나왔다. 의외라는 듯 쳐다보는 그에게 내 빽은 하느님이다, 하느님께서 내 뒤에 계시는데 뭐가 무서울 게 있겠냐며 큰소리 떵떵 쳤다. 

 

캄캄한 밤을 가르던 소리는 믿음을 의심받는 나 자신에게 하는 외침이었다.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의 반응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가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전환해 열렬히 활동한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만 있었다. 몇 해 후에 그의 심장에 암이 생겨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심장에 암이 생겼단다. 그 소심한 친구가, 그 여린 친구가 이 험한 세상의 불의와 맞서고자 혼자서 용을 썼을 테니 병이 안 생겼을 리가 없다. 하필이면 심장이라니, 작은 심장에 그의 고민이 다 응어리졌었나 보다. 아무에게도 기대지 못하고 자신의 심장에 돌을 던져대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느님 빽을 만들어줬어야 했는데 내 무심함이 원망스럽다. 어마어마한 하느님 빽에 기대면 그도 잘 헤쳐나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느님께 의탁하는 법을 알려주었어야 했는데. 그가 목에 핏대를 올리며 부르던 ‘임을 향한 행진곡’이 귀에 맴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친구는 남김없이 모든 것을 소진하고, 못내 이룬 그의 한이 심장을 돌로 만들어버린 후 세상에서 사라졌다. 좀 더 일찍 하느님 빽을 알려주지 못한 나를 자책해 보는 밤이다. 하느님 곁에서 영일이가 깨진 마음을 붙이고 편히 쉬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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