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0.07.24 10:45

부끄러움을 장작삼아

조회 수 301
Extra Form
저자 name

나는 공짜를 참 좋아한다. 마트에 가면 시식을 거절한 적이 없고 샘플도 일단 받아온다. 그래서인지 몇 해 전 본당에서 오경필사노트를 나눠줬을 때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온 후 허리디스크로 힘들어하는 친구를 위해 봉헌하겠다며 필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하루만 미뤄도 몇 장이나 밀려서 진도를 따라잡기 힘들었고 아무리 적어도 창세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속도에 점점 지쳐가다가 결국 필사노트는 책상 가운데에서 책장 끝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필사노트를 다시 꺼내게 된 과정에 대한 것이다.

현재 육아휴직을 하고 있는 나는 이 시기에 뭔가를 배우고 싶었고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집에서 노트북으로 한국사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큰 별 최태성 선생님은 첫 시간에 한 번의 인생, 한 번의 젊음을 어떻게 쓸 것인지 물었고 선사시대 강의에서는 자연 앞에서 몇몇의 사람들이 함께 잘 살아보려 했던 노력의 증거를 통해서 각 시대마다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길 바란다고 했다. 그때 ‘노력의 증거’라는 말에서(다소 엉뚱하지만) 6일 동안 쉬지 않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노고가 떠올랐던 건 아무리 적어도 끝이 없는, 그렇다고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는 필사의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창세기여서 그랬을까?

 

그리고 고려시대 강의에서는 총 81,258장의 목판에 84,000개의 부처님 가르침을 새긴 팔만대장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해인사로 옮길 때 삼 보에 한 번씩 절을 했다는 것도 알게 되어 그 정성에 감탄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나의 필사노트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일상생활과 접점이 없는 지역명과 쏟아지듯 나오는 이름들, 또 별도의 해설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항상 어렵다. 그렇다 해도 하느님의 말씀을 하루하루 기록하며 봉헌하겠다는 다짐을 했다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기 위해 좀 더 애쓰고 좀 더 적응해보려 했던 노력의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책장을 넘길수록 악필로 채워진 자리에 물까지 쏟아 뒷장은 약간 찢어진 노트를 보며 ‘내가 이런 마음으로 뭔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빌었단 말인가?’라는 부끄러움에 머리끝까지 푹 잠기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 필사노트를 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곁에 두고 나의 부끄러움을 장작삼아 열심히 태우듯 매일 한 줄이라도 반듯하게 적어나간다면 언젠간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조금 더 알게 되고 친구를 위한 필사봉헌도 경건히 드릴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1. 사라져 가는 것들에 관해서

    Date2020.08.21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184
    Read More
  2. 성모님께 간절한 도움 청하며 걸어온 월남동성당

    Date2020.07.28 Category본당순례 Views691
    Read More
  3. 부끄러움을 장작삼아

    Date2020.07.24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301
    Read More
  4. 전교불모지 통영에 불길을 당겼던 태평동성당

    Date2020.07.03 Category본당순례 Views1368
    Read More
  5. 니는 무슨 빽 있노?

    Date2020.06.26 Category영혼의 뜨락 Views327
    Read More
  6.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Date2020.06.19 Category제자들 Views357
    Read More
  7. 천주교마산교구사회복지회 사랑의집

    Date2020.06.12 Category제자들 Views334
    Read More
  8. 120년의 역사와 전통 완월동성당

    Date2020.06.05 Category본당순례 Views974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Next
/ 37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