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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기도 100만 단 바치면서 성전건축

아직 부산교구 시절이었다. 마산성당(현 완월동성당) 9대 주임 김두호 알로이시오 신부는 신마산 지역 성당 설립을 계획했고, 1957년 6월 신마산본당(현 월남동본당) 설립이 이루어졌다. 김두호 신부가 겸임하여 초대 주임이 되었으나 건강이 여의치 않아, 5개월 남짓 후 1958년 정삼규 요한 신부가 부임하여 마산본당과 신마산본당을 같이 사목했다. 기성회를 통해 식산은행 건물을 매입한 후 수리하여 임시 성당으로 개조하고 그곳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출발했지만 월남동본당의 역사는 애매한 점이 많다. 한 분이 두 본당을 맡아 사목하니 구분이 확연하지 않았다.

 

200802월남동성당 전경(홈피용).jpg

현 월남동성당

 

1965년 1월 유재국 바실리오 신부가 4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비로소 마산성당과는 완전히 분리된 셈이다. 바로 성전 신축을 계획하고 5월에 기공식을 가졌다. 온 교우들의 염원과 땀으로 성전을 지었다. 당시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는 묵주기도 100만 단을 바치면 경비를 지원하겠다고 했고, 교우들은 지극정성으로 약속을 지켰다. 감동한 최 주교는 거액의 기금과 프랑스에서 만든 청동 종을 선물했다. 어렵사리 건축을 하는 사이 1966년 마산교구가 설정되었고, 이듬해 박재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로 바뀌었다. 1968년 3월 마산교구장 김수환 주교 집전으로 월남동성당 헌당식을 올렸다. 파티마 성모발현(1917년) 50주년을 맞은 즈음에 교우들이 묵주기도를 엮어 올린 시간도 바쳤다. 본당주보는 ‘파티마의 성모’로 정했다.

 

성전 화재로 탄 상처, 굳건히 치유

1990년 7월 21일 새벽이었다. 전기누전으로 추정되는 화재로 성전 내부가 완전히 소실되는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성전 바닥은 재와 물 범벅이 된 처참한 광경이었다. 故 서원열 주임 신부는 성체가 가득 담긴 성합을 끌어안고 주저앉아 오열하였고, 그를 본 교우들도 통곡을 멈출 수가 없었다. 푹푹 찌는 더위와 절망감을 뒤로 하고, 사제를 중심으로 월남동성당 공동체가 일어섰다. ‘우리 성전은 우리 손으로’라는 의지를 결의하고 첫 성전을 짓던 염원과 땀을 다시 불러내었다. 불에 탄 성전을 복구하기 위해 공동체는 더 뜨거운 불꽃을 태웠다. 성전 복구를 위한 기도문을 만들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진실로 이 일(성전 복구)을 간절히 바라느냐 하는 것입니다.”라는 표어를 쉼 없이 복창하며 하느님께 매달렸다. 10개월의 촘촘한 결속의 시간이 지나고, 1991년 5월 21일 교구장 박정일 주교 집전으로 성전 축성식을 가졌다. 이날 사제, 수도자, 교우 등 900여 명의 은인들이 함께하여 감동을 나누었다. 각 본당의 도움에 감사하고, 공동체 구성원 간의 신뢰와 견딤에 서로 박수를 보냈다. 당시 故 서원열 신부의 소회를 적은 글을 지금도 기억하는 교우가 있다. “성전의 모든 것이 남김없이 전소되어 버린 가운데서도 기적 같은 신기한 일이 있었다. 불타는 창 가까이 있는 성심상과 벽속 감실안의 성체와 제의실 모퉁이의 제의장 속 제의는 그대로 있었다. 성심상과 성체와 제의가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끝까지 사제로 잘 살아가라는 희망의 표지로 용기를 얻었다.”

 

또 새로운 성전 건립에 나서다

아직 화재에서 성전을 복구한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댓거리 성전 건립을 위하여 다시 공동체가 뭉쳐야 하는 때가 왔다. 1997년 1월부터 묵주기도 10만 단 바치기 운동과 더불어 기금 신립을 하며, 돈이 되는 일에는 발 벗고 나섰다. 바자회를 하고, 주점을 빌려 일일주점도 열었다. 행사장에서 김밥과 커피를 팔고, 음악회 티켓도 팔았다. 교우들의 손을 모아 성전을 건립하고 1998년 4월 5일 마침내 봉헌식을 이루었다. 해운동본당(현 월영본당) 분리를 매듭지으면서, 초등학생부터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헌금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기에 대역사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험난한 그 순간이 은총이었다고 했다.

 

200802월남동성당1(홈피용).jpg

본당 바자회 중

 

뿌듯한 마음도 잠시 그다음이 문제였다. 새 성당으로 살림을 내고 보니, 월남동성당은 교우들의 고령화가 심각했다. 다음 해에 부임한 사제는 첫 느낌이 “밥그릇에서 가운데 밥이 움푹 파인 것 같다.”고 했다. 그만큼 허탈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서 어느 교우는 어떻게든 성당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일부러 빨간색 옷을 입고 성당에 갔다고도 했다. 2001년에는 시대에 맞게 예술성을 살려 제작한 성모상을 모시고 동산을 아담하게 조성했다. 창고에 잠자고 있던 청동 종은 종각을 만들어 설치하고, 평소에는 치지 못하지만 장례식에는 조종을 울리도록 했다.

 

200802 월남동성당(홈피용).jpg

청동 종

 

다시 손 모아 본당 설립 60주년을 안다

앞서도 말했지만, 월남동본당 설립은 1957년과 1967년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다. 신마산성당으로 출발하며 마산성당과 혼합 운영되었던 시간, 부산교구에서 마산교구로 이동하는 과도기의 시간을 명확하게 구분 짓지 못한 때가 있었다. 1967년 설립으로 기록된 오랜 시간도 있었다. 60주년을 준비하면서 역사를 정비하고, 헷갈린 설립일은 1957년 6월 20일로 확실하게 기록했다. 2016년 6월 ‘은총의 60주년, 기쁨과 감사의 60주년’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다음해까지의 청사진을 펼쳤다. 개막미사를 시작으로 재도약을 꿈꾸며 공동체의 힘을 북돋웠다. 몸에 밴대로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며 연륜이 깊이 쌓인 교우들이 다시 손길을 모았다. 2017년 「월남동성당60년사」를 만들면서, 하느님 섭리를 다시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교구장 배기현 주교 집전으로 6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였다. 월남동성당 출신 배기현 콘스탄틴 교구장을 모시고 60년 역사를 말하는 그날은 교우들에게 기쁨이 샘솟는 최고의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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