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0.11.24 16:56

신이 나에게 맡겨놓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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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유시연 레아 소설가

신이 나에게 맡겨놓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투명하게 맑은 가을 하늘을 쳐다보며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코끝에 스치는 맵싸한 바람결에 계절이 지나감을 느낀다. 추수가 끝난 빈들에는 참새 떼가 내려앉고 화려한 색깔을 수놓던 꽃과 나뭇잎들도 맥없이 스러져서 고요히 대지에 안겨들었다. 살아있는 생명들이 모두 자연의 품 안에서 쉬고 있는 이 계절은 신이 인간과 자연을 위해 마련한 자비의 시간이다. 맹렬한 기세로 뻗어가던 생명체들이 최선을 다해 살아내던 에너지를 내려놓고 이제 긴 침묵에 들어가려 한다. 인간이나 자연이나 살기 위해 애쓰던 날들, 폭풍우를 뚫고 뜨거운 태양을 피해 살아남은 지난 시간 앞에 겸손하게 때를 기다리고 있다. 11월은 가톨릭의 전례력으로 위령 성월의 달이다. 특별히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는 아름다운 전통 안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세상에 대해 한 번쯤 더 사유하게 된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미하리니… 시편 기도의 깊은 의미가 가슴에 들어오지 않던 젊은 날에는 모든 것이 나 개인의 욕망과 욕구 충족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느라 영혼을 살찌우는 기도문이나 빛나는 세상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 세상이 아닌 저 너머 세계에 대한 믿음도 막연하기만 했다. 어슴푸레한 저물녘, 맛있는 풀로 배를 채운 염소 떼가 울타리로 돌아오는 시간, 하루의 노동과 짐을 내려놓고 따뜻한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뒤로 석양이 진다. 수고하고 짐 진 이들이 고요히 휴식에 잠기면 대기도 깊은 침묵에 빠져든다. 신이 산책할 것만 같은 고즈넉한 대지, 빛도 어둠도 아닌, 낮과 밤이 교차하는 경계에서 인간은 자연의 순환이 일깨워주는 신비함도 잊고 살아가기 바쁘다. 11월, 위령의 달에 인생에 대해 천착하게 되고 죽음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본다. 푸른 하늘에 무심히 떠있는 새털구름이나 벌레 먹은 나뭇잎이 발밑에 떨어져 내리는 것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노랗고 붉게 물든 잎사귀가 서서히 생명의 기운을 다해 가는 그 시각, 아이러니하게도 한쪽에서는 무와 배추가 싱싱하게 차오르고 있다. 달이 태양의 그림자에 밀려나듯이 세상은 삶과 죽음이 나란히 질서를 떠받치고 있다. 연옥 영혼들이 우리의 기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이 계절에 번잡한 것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기도할 때 내 마음의 욕망은 줄어들으려나. 아름다운 것을 제대로 느끼고 함께 사는 이들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이 된다면 세상은 한결 평화로워지리라. 추수가 끝나 적요한 대지를 보며 하느님이 나에게 맡겨놓은 시간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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