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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뜨락
2020.12.17 16:28

기다림

조회 수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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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준호 라파엘 수필가

사람의 흔적과 머무른 자리가 애잔할 때가 있다. 방금까지 있었던 사람인데 한동안 보이지 않으면 더욱 그렇다. 식지 않은 온기가 머무르는 듯 사라진다. 손때 묻은 수첩과 머그컵이며 필기구가 마지막이 되는-그렇지 않겠지만-괜한 상상을 한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현실로 돌아온다. 위령 성월 동안 죽음을 너무 떠올렸나 싶다. 살아있는 동안 부지런히 살고 그 순간들만을 간직하리라 마음먹는다. 그새 겨울눈처럼 탁자에 먼지가 쌓여 있다. 긴 기다림 속에서는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둔감해진다. 쌓인 먼지를 그래서 떨어낸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다.

 

얼마 전 코로나19로 인해 돌아오지 못하는 지인이 있었다. 그의 안부를 자꾸 물을 수가 없었다. 고통을 어렴풋이 짐작하기만 할 뿐 동병상련과는 거리가 멀었다. 보름만 두문불출하면 된다고 하더니, 가족의 추가 확진으로 2주가 더 연장되었다. 자가격리를 삼칠일째 하고 있다는 그의 목소리는 평온하기까지 했다. 무거운 공기가 짓누르듯 가라앉았던 처음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을 돌아보았노라고 했다. 전화기 너머 달그락거리는 소리 가운데, 그는 주방의 싱크대를 닦고 있었다. 아내는 아직 의료원에 있다고 했다. 수염이 얼굴에 가득 나 있을 것 같은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끝날 것 같던 사태는 여전히 종식되지 않았지만, 일 년의 끝자락은 보이기 시작한다. 온라인으로 가계부를 새로 샀다. 잉크 냄새 물씬 나는 새 가계부를 넘겨보았지만 무게감만 드리워진다. 그래도 몇 년째 적어온 숫자들은 지나온 세월의 징검다리처럼 보인다. 망각으로 늘 가라앉는 일상에서, 꼬박꼬박 적어 온 숫자는 나의 기억을 돕고 있다. 가벼운 웃음이 배어 나온다. 코로나 덕분에 통장 잔고가 바닥나지 않았다. 겨울의 맑은 공기를 맡으며 아이들과 해외여행을 하고 싶다는 의욕이 올라온다. 다시 엷은 웃음이 나온다.  


유튜브에서 미사를 매일 보며 내년 성탄을 다시 기다리게 된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자정미사 다녀오는 길에 사 왔던 굵직하고 하얀 엿을 아직도 기억한다. 성탄 전야의 연극 대사도 애틋하게 다시 떠올리곤 한다. 기다림의 감동은 갈수록 엷어진다. 대림 시기 동안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준비하였던가? 한 해의 끝자락에서 빨래를 걷듯 기다림을 거둬들이리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다. 햇살 가득한 탁자에 앉아 새해가 시작된 전례력을 천천히 넘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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