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2.01.20 11:53

새해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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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윤유경 세실리아 수필가

도서관에서 ‘멋진 지구인이 될 거야’라는 만화책을 빌려왔다. 지구 환경을 위한 실천에 대한 내용이었다. 아들과 함께 이 책을 읽으니 아들은 우리도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며 나오는 것마다 실천해 보자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겉으로는 멋진 엄마처럼 ‘그럴까?’ 하며 맞장구를 쳐 주면서도, 속으로는 ‘융통성’ 없이 무조건 해보자는 어린 아들을 비웃고 있었다.


나도 지구 환경에 관해선 나름 관심이 많은 편이다. 내가 실천할 수 있는 한, 지구에 해가 되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도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어린 아들을 비웃었던 그 ‘융통성’이라는 것에 나는 늘 걸려 넘어지곤 했다. 


우리 집에는 여기저기에서 받아온 까맣고 하얀 봉지들이 차고 넘친다. 나는 차마 버리지 못해 작게 접어서 모아두곤 했는데, 장이 서는 날엔 한 번씩 그것들을 들고 간다. 채소를 파는 할머니들에게 필요하다면 드리기 위해서인데 그게 참… 부끄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호박이며 대파를 한 단 사면서 슬쩍 여쭤본다. 


“혹시 비닐봉지 필요하세요?” 


그러면 할머니들은 대부분 흔쾌히 받는다. 새댁이 참 알뜰하네, 라는 칭찬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때는 무표정하게 그냥 두고 가라는 제스처만 취할 때가 있다. 그러면 그다음부터 나는 융통성이라는 혼란에 빠진다.

 

220123 영혼의뜨락(홈피용).jpg


‘아… 싫어할 수도 있는데, 이걸 계속해, 말아?’


내 비닐을 챙겨가지고 장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내 비닐을 채 꺼내기도 전에 먼저 비닐에 물건들을 툭 담아준다. 그럴 땐 또 융통성이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춤을 춘다.


‘아, 다시 내 비닐에 담겠다고 말을 할까 말까? 유별나다고 생각할 텐데…’
카페에서 커피를 시킬 때도 마찬가지다. 미처 머그컵에 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종이컵에 담아주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내 융통성은 재빠르게 발휘된다. 종이컵 한 장 더 쓴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잖아?


이러저러한 융통성으로 인해 우리 집에는 비닐봉지가 늘 침입하고 종이컵, 빨대, 플라스틱 컵과 용기들이 상주하고 있다. 그것들을 받을 때면 기분이 묘해진다. 실패에 대한 쓴맛과 살아있는 내 융통성에 대한 안도감이 적절히 섞여 웃지도 울지도 못한 상황이 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편리함으로 점점 뜨거워지는 지구와 넘쳐나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실까? 코에 빨대가 꽂힌 거북이의 비명과 뱃속을 쓰레기로 가득 채운 고래의 고통을 슬퍼하지 않으실까? 내가 버린 쓰레기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 모두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사실 매번 나를 실패하게 만들었던 건 융통성이 아니었다. 그건 융통성이라는 이름의 자기 합리화였다. 새해는 다시 돌아왔고 나는 한 번 더 다짐해 본다. 조금만 더 불편해지자고, 조금만 더 용기를 내자고. 내 불편함과 용기가 어떤 생명에게는 모든 것이 될 수가 있다고.

 

220123 영혼의뜨락 백그라운드(홈피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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