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2023.05.11 09:52

나는 계속 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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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변혜연 율리아 시인

230514 영혼의뜨락(홈피용).jpg

 

아홉 살 꼬마가 참 오래 걸었다. 두어 걸음 뒤에서 따라오라 했다. 낯선 길도 더는 낯설지 않았다. 이야기 같은 길을 계속 걸었다. 친구인 듯 걸었다. 내 키보다 큰 코스모스 옆을 걷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걸었다. 걷지 않으면 답답하여 걸었다. 푸르스름한 새벽을 걸었고 태양을 머리에 이고도 걸었고 짊어진 채로도 걸었다. 북극성 자리에서 북두칠성 자리를 오가며 걸었다. 물길을 따라 가장 많이 걸었고 가리지 않고 걸었다. 틈만 나면 걸었다. 생일에는 김이 나는 미역국을 후 후 불어가며 걸었다. 잔소리와 퉁퉁 불은 떡국을 먹은 날도 걸었다. 꽃잎 물고 뙤약볕 속으로 이십 대의 여름을 걸었다. 안개 안으로 걸었고 겨울에는 얼은 벼랑길을 걸었다. 걷다 보니 언제 꽃이 피는지, 잔가지를 옮기는 새를 보면 곧 알을 낳겠구나 싶고 고춧대를 그대로 두는 이유를 생각하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도 만났고 멈추는 법이 없다는 자연도 만났다. 가끔은 내 쪽에서 외면했지만, 거미줄에 걸린 벌레에서 흙바람까지 길동무가 되었다. 오래 걸을 수만 있다면 외롭거나 두렵지 않을 거라는 마음으로 걸었다. 냉이꽃 사이로 냉이를 파는 아주머니가 있다. 바닥에 펴둔 헝겊이 채 두 뼘이 되질 않는다. 물건을 파는 사람들 사이에 박혀 있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잔뜩 웅크린 채 바닥만 보고 있다. 보다 못한 이웃 장사꾼이 “곧 파장인데 어여 어여 팔아” 한숨을 뱉어가며 소매를 쓸어 올린다. 나는 이 천 원어치 냉이를 샀다. 옆에선 넉넉히 주고 어여 팔아라 해도 아주머니는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친다. 실랑이로 소란스러워지자 기웃기웃 사람들이 모여들고 두어 명이 냉이를 더 샀다. 살짝 비켜, 나는 걸었다. 사 온 냉이가 식탁에 오를 때마다 냉이꽃이 피겠다 싶다. 왜 그리도 작았나 싶은 헝겊도, 안 된다고 손사래 치던 모습도 조물조물 무쳐서 식탁에 올려야지 싶다. 아홉 살 땐 몰랐던 냉이꽃에서 흰 방울 소리가 난다.


시간에 비해 세월이 바삐 간다. 봄에서 여름으로 모호한 경계를 걸었고 짧아진 겨울을 걸었다. 떼로 오는 무리를 뚫고 걸어야 할 때도 걸었고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도 걸었다. 갈림길은 선택과 집중을 요구했고 접어든 길을 계속 걸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대나무 숲에 갇혀 출구를 찾을 수 없어도 걸었다. 아물지 못한 상처가 자꾸만 들썩거린다. 상처를 껴안고 걷는 길은 상처투성이지만 세상에 난 모든 길은 한곳으로 통한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처음부터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나 보다. 최근에 읽은 『하느님, 빵 좀 팔아 주세요』라는 책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과 꽤 닮았다. 깡패조직에서 두목(책에서는 오야봉)으로 살았던 그가 세례(남종삼 요한)를 받고 어둠에서 빛으로 걸어가는 내용이다. 꼭 할 일이 있어 그것을 다 할 때까지는 죽을 수 없었다는 남종삼 요한의 고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성모 울타리공동체는 성경에서 돌아온 탕자의 비유처럼 돌아갈 집이었다. 30여 년간 걸쳐 무려 500여 명의 형제를 집으로 돌아오게 한 주인공은 이 모든 건 아버지의 자비라 고백하며 빵 반죽으로 분주하다. 성모 울타리공동체는 건강한 노동으로 찬미와 감사를 이어가고 있다.


그때 그 아홉 살 꼬마는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하시는 주님과 끊임없이 걷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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