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삶 속의 순례길

posted Jan 1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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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윤선희 드보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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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대단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구보에서 ‘한티 가는 길’이라는 순례길 걷기 광고를 보고 얼른 신청했던 건, 인원이 금방 차버릴까 걱정되어서였다. 그즈음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할 일들을 미루지 말자는 생각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러지 말자고. 그간 핑계를 대며 마음을 눌러왔지만 어쩌면 내게 기회가 많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씩 바닥까지 닿을 듯한 우울한 상태가 되면 벗어나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인생을 실패한 것 같은 절망이 덮쳤다. 바깥에서 보는 내가 어떤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나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으로 인해 망쳐버린 여러 일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 와 보니 스스로를 인정하고 화해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 같다. 그렇다 해도 한티 순례길이 이런 마음을 해소할 거란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해야 할 것 같았다.


순례길은 거의가 비탈이 심한 산길이었다. 등산화와 스틱이 아니라면 발을 내딛기 어려울 정도였다. 오기 전 짐을 싸면서 많은 짐에 넌더리를 내며 스틱을 두고 왔던 나는, 두 발로 용을 쓰며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앞사람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쓰며 그의 발뒤꿈치에 집중했다. 미끄러지거나 다치거나 할까 봐 주위를 둘러보거나 다른 생각을 할 새가 없었다. 첫날 저녁식사 후에 강의를 들었다. 산티아고 카미노(순례길)의 첫 한국인 사제로, 5년간 라바날 수도원에서 순례자들을 만났던 인영균 신부님의 강의였다. 산티아고나 한티 순례의 목적은 무덤을 참배하는 것이며, 순례의 시작은 집에서 가방을 메고 나오는 순간부터라 했다. 그러나 이런 순례는 다 가짜이며 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무슨 엉뚱한 말인가 했는데, 진짜 순례는 매일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지당한 말이다. 3일을 연달아 걷는 여정이 내 삶에서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겠는가. 그저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깐 일탈하는 이벤트에 불과할 것이다. 길을 안내하고 뒤처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봉사자들과 함께 걷다 돌아오면,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숙소가 제공되는, 잘 준비된 프로그램에 따라 사서 하는 고생일 뿐이다. 정말 그것뿐일까?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일기에 참 기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고 썼다. 그렇게 쓰고 나니 기쁨과 감사한 마음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산길을 걸을 땐 단순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치지 않고 잘 걸을 수 있는데 집중해야 했다. 삶의 카미노(순례길)로 돌아와서도 나는 단순해져야 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계속해서 주님을 알고 싶다. 그분께 다가갈수록 삶의 의미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그분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주위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여정을 이어가야 한다. 행복하다고 말해 본다. 그러면 점점 몸에서 따스한 기운이 퍼져 나가는 것 같다. 새삼 말의 힘을 느낀다. 나는 이제 행복한 순례를 시작할 것이다. 새해의 새로운 길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