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뜨락

아내를 황제처럼 섬기던 어떤 젊은 노예

posted Feb 1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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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윤혁재 레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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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거나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을 돌봐주는 것이 “바로 나를 위함이다.”라는 신앙의 본질을 배우려, 소신학교 대신학교 군대 삼 년을 마칠 때까지 나를 데리고 다니다, 운이 안 좋아 학교로부터 쫓겨난 내 열등의 시간 동안 부천 뒷골목 가난한 동네를 헤맬 때, 배웠던 것 다 까먹은 줄 알았는데, 어릴 적 읍내 살던 아픈 장애 처녀 마리아를 따뜻하게 맞이해 살아보라는 내 선생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날로부터 마리아와 함께 병원 문턱을 한 삼십 년 넘게 들락거렸다. 그때마다 턱하니 기다리고 서 있던 그 두려운 죽음의 골짝을, 당신이 기적처럼 우리에게 보내주신 귀한 딸 아름이와 함께 제 어미 손 꼭 잡고 감사한 맘으로 기어오르다, “이젠 이십일 세기의 의술보다 최고의 치료는 맑은 공기다.”라는 주치의 진단을 보듬고, 954호 중환자실을 탈출하여 고향 산천 내렸더니, 여직 까맣게 귀 막혔던 놀라운 사실 하나에 또 바수어진 내 맘 싸매지도 못한 채, 나는 이 소문의 진원지를 여기저기 헤적여보았다. “약한 이웃을 도와주는 게 나를 위한 것이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세뇌시킨 당신을 흉내 내다 ‘반푼이’가 되다 못해, 이젠 위선자라며 ‘새꼬롬한’ 눈총을 쏘아대는 이놈의 고향을 고마 콱, 하느님요! 우째삐리까요? 


당신이 더 잘 아시다시피 마리아는 태생으로, 가는 팔 다리로 새파란 숨을 내쉬다 자주 엎어지는 장애가 일어나는데요. 그때마다 장모님은 “찬찬히 두 손 잡아 일으켜, 괴로워하더라도 잘 달래어, 그 고된 ‘석션’을 기도로써 서로 참아내며 살아 주길 바라네.” 하시던 그 간절한 바람보다, 당신이 부탁한 이 길을 세상 그 뭣보다 두 귀 쫑긋 세워 보살피라 하셨기에, 어린 딸 아름이와 함께 그 너른 눈물강을 애 터지게 저어 오다 육십이 다 된 저물녘에, 어찌 오늘은 이 노예의 팔도, 귀한 딸의 고운 손도 빌리지 않고, 하느님 손만 꽉 잡고 저 너머 길을 혼자 갈 줄 아셨는교, 저 공중의 빛나는 수많은 별들은 저마다의 신뢰의 희망이지만, 그대가 철석같이 의지하던 이 노예의 별은 잠시 동안 반짝이다만 별똥별이었네요.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한 번 그대를 위한 반짝이는 별이 되고 싶으오, 지난날의 내 결연한 의지가 나약한 환상에 머무른 게 너무 죄스럽소, 마리아요, 우리가 즐겨 듣던 ‘레너드 코헨의 푸른 레인코트’ 위로 올해도 어스름히 내려앉는 성탄이, 는개처럼 내 맘의 강을 사알살 흘러 다니네요, 참 기쁜 소식 하나요, 귀한 딸 아름이가 어릴 적 당신의 병약한 죽음의 트라우마에 한동안 헤어나지 못하다 요샌 주일미사도 보며 그냥저냥 지내 주니 참말로 고마울 뿐이지요. 


“이웃을 내 식구처럼 어루만져 주라.” 하신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던 ‘반푼이’ 같은 신앙의 삶과, 먼눈으로 빈정대며 바라보는 세상의 삶과의 괴리에 절망한 지금을, 또 불러내시어, 이 열등의 나이에도 시詩를 한번 써보라 꼬드기십니까. 내 컴컴한 헛간의 가슴 밭에 오래 처박혔던 검푸른 시간들이, 저 하얀 하늘 밭에 쏘옥 잡혀 나와, 시퍼렇게 잡아 삼킬 바다처럼, 내 바닥 모를 바알간 눈물이 겁 모르고 대들다, 전신줄에 목을 매는 바람의 시간에 그만 폭삭 절여져, 잘 썩은 거름인 양 소쿠리에 퍼 담아, 한겨울 보리밭에서 더는 하얗게 움츠려들지 않으려, 샛노란 몸 빠끔히 내미는 저 이파리들을 위해 흩뿌리라 하시는교. 시인이 밤새도록 어루만져 토해 내는 시처럼 참 기도인 양, 두 손 모으겠습니다.


✽석션suction: 폐 속에 찬 가래와 침을 빼 내기 위해 호스를 폐 속까지 넣어 빨아내는 의료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