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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 시절의 일이다. 정확히 언제쯤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직 옷을 따뜻히 입고 다녀야 할 계절이었음은 확실하다.

성당에 갈 일이 있어 걸어가는 도중이었는데, 중간에 걸인처럼 보이는 이를 지나쳤었다.

행색이 남루했고, 한동안 씻지 못한 듯 얼굴엔 거뭇한 때가 끼어 있었다.

그래도 신학생이었던지라 하느님께서 양심을 움직여 주셨는지,

마음속에선 저 사람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어야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무색하게도 말 그대로 ‘지나쳤다.’

 

이 기억이 오래간 이유는 다른 문제 때문이다.

각기 다른 때이지만, 이후에 비슷한 장소에서 그 사람을 두 번 더 마주쳤는데,

같은 마음이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내 그 사람을 지나쳐 보내었다.

운명의 장난 같은 시간이 지나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주님께선 혹시 당신이 형제로 삼으신 ‘가장 작은 이들’(마태 25,40)의 모습으로 나를 시험하셨던 것은 아닐까,

주님의 뜻을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하는데 과연 내가 그분의 도구로 살아갈 수 있을까….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 하신 주님의 말씀을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이후엔 다른 고민의 순간이 찾아왔다. 해진 후 신부님들과,

혹은 본당의 단체들과, 혹은 소소하게 친구와 술 한 잔 기울이고 있을 때면 가끔 마주치는 이들이다.

형편이 어려워 물건을 팔거나, 그마저 준비할 여건이 안 되었는지 빈손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

그들을 두고 드러나는 모습은 다양했었다. 이런 방식으로 도우면 그 사람들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모습도 있었고,

이유야 어찌되었든 호의를 베푸는 모습도 있었다. 나는 대개 조심스레 거절하거나 거부하는 모습이었다.

 

판단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가령 지역 축제가 열리는 곳이면 한 번쯤은 보았을,

수레 비슷한 것에 의지해 땅을 기어 다니며 동정을 사는 이들이 그 통을 뺏어보니 없던 다리가 솟아나 일어서더라느니,

아니면 구석진 곳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물건들을 챙기고 가더라느니 하는 경우도 그러하고,

동네를 다니며 시주를 받던 어떤 스님 혹은 비구니가 값비싼 차를 타고 퇴근(?)하더라느니 하는 경우도 그러하고.

가난한 이들이 가난마저 도둑맞은 시점에서 속지 않고 참된 도움을 주는 일이 가능할지 의문스럽긴 하다.

 

그런데 이 생각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 기회가 있다.

서울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인데, 돌아오는 열차 시간이 남아 서점에 잠시 들렀었다.

이런저런 책을 보다 『죽기 전에 한 번은 유대인을 만나라』는 제목에 끌려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율법에 기초해 일상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권하는 듯한 내용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가난한 이들에 대한 대목에 관심이 생겨 읽어보았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는데, 그 책에선 이렇게 이야기했다.

가난을 흉내내는 자들 가운데 진정 가난한 이가 섞여있을 수 있다고,

그들을 돕는 가운데 필요한 이에게 진정한 도움을 전할 수 있다고,

그렇기에 가난을 입은 자들을 함부로 내쳐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 책을 쓴 이의 마음속엔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있으며, 수백 가지 이유로도 그 말씀을 무너뜨릴 수 없어 보였다.

그 거울에 나를 비추니 강도당하고 초주검이 된 이를 지나친 사제의 모습만 보였다.(루카10,30-31) 창피한 노릇이다.

사랑이니 자선이니 말만 앞세웠지, 실상 나 자신은 그 말들을 가로막고 있어 보였기에.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는다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1코린 13,7)

부디 주님께서 가난을 입은 이들을 믿고 덮어줄 수 있는 사랑으로 나를 채워주시길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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