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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단편 「벌레 이야기」는 영화 ‘밀양’의 원작으로 잘 알려진 작품이다.

하지만 원작은 사건이 중심이 된 영화 ‘밀양’보다 좀 더 인물의 내면 갈등에 초점이 가 있고,

그 갈등의 중심이 바로 ‘용서’와 구원의 문제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생각보다 꽤 어려운 작품이다.

  

초등학교 4학년생인 ‘알암’은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로 별다른 취미생활을 갖지 못하다가,

최근에 학원까지 다닐 정도로 주산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알암은 유괴를 당한다.

알암의 엄마는 이웃인 김 집사의 권유로 기독교 신자가 되어 하느님이 자식을 무사히 되돌려주기를 기원하지만,

유괴 80여 일 만에 알암은 결국 변사체로 발견된다. 범인은 다름 아닌 주산학원의 원장이었고, 그는 사형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다.

 

아들이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깊은 슬픔에 잠긴 엄마는 신앙을 버리고 범인에 대한 원한과 저주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그녀는 아이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김 집사의 설득에 다시 하느님을 믿고 범인을 용서하기로 마음먹기에 이른다.

그녀는 심사숙고 끝에 자식의 살해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면회를 간다.

그러나 그녀의 어려운 결심과는 판이하게 유괴 살해범인 주산학원 원장은 수감 생활 중에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를 받았다며

평온한 자세로 그녀를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모습에 그녀는 깊은 절망감을 느낀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를 했단 말인가.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던 중, 살해범이 사형집행을 앞두고 남긴 유언, 즉 자신은 너무도 평온하며,

다만 유족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라는 말을 라디오를 통해 들은 후 그녀는 약을 먹고 자살하고 만다.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지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용서하느냐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 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이 작품의 요점은 바로 ‘내가 아직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를 먼저 용서할 수 있으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 「벌레 이야기」의 ‘벌레’는 유괴 살인범인 주산학원 원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용서’의 권리까지 없는 하찮은 미물이라고 여기게 된 주인공인 알암 엄마를 가리키는 것이다.

 

줄거리로만 볼 때 「벌레 이야기」는 종교적 내용이지만,

대개의 문학이 비유적이듯이 이 작품도 광주 사태의 주범인 전두환을 모티프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작품의 배경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이 소설은 피해자에 대한 진실한 사죄의 마음이 없다면 참다운 용서도 있을 수 없다는

보편적인 주제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죄를 고백하면 하느님이 용서한다는 것은 ‘고백’이 스스로 자기 죄를 뉘우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반성의 행위까지 하느님이 대신 해 주시지는 않는다. 단순히 ‘신앙을 가졌으니까’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주체적 인간으로서 다른 이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은 용서하신다.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하찮은 ‘벌레’ 같은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로 만드셨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고백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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