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20.05.15 11:14

삶의 보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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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호주에 대규모 산불이 있었다. 이 산불로 한반도 면적의 약 85%에 해당하는 거대한 숲이 사라져버렸고 수많은 동물들이 불에 타 죽었다. 인명피해도 많았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 산불은 그냥 ‘호주 산불’이었다. 지구의 산불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의 재난이 아닌 그들의 재난이었다. 이것이 이 시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세상 어딘가에서 지진이 나고 화산이 폭발해도, 빙하가 녹고 기후가 변해도, 방사능에 오염되고 전염병이 창궐해도, 전쟁이 일어나고 난민이 발생해도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 어딘가의 재난일 뿐이다. 사고를 당하고 병에 걸려도, 살해되거나 자살을 해도, 사기를 당하고 도둑을 맞아도, 일터에서 쫓겨나고 길거리에 나앉아도, 그렇게 죽고 다치고 병들고 빼앗기고 버려져도 그것은 그 누군가의 비극이지 나의 비극은 아닌 거다. 그래서 세상에 온갖 죽음과 고통과 위험이 만연해도 사람들은 태연하게 살아간다. 내 일이 아니니까! 나는 괜찮으니까! 난 아닐 테니까!

 

언제부턴가 우리의 모습 안에서 ‘보편성’ ‘관계성’ ‘공동체성’과 같은 삶의 중요한 요소들이 사라져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지만 함께 살아가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수많은 ‘개별적 삶’이 모여 있을 뿐 ‘공존하는 삶’은 아닌 거다. 각자의 삶에만 치중하다 보니 서로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공감능력은 희미해지고 그로 인해 공존능력까지 상실되어 간다. 결국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 알아서 능력껏 생존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적자생존’과 ‘자연도태’의 세상 속에서 ‘각자도생’하는 거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우리 삶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다.

‘코로나19’라고 불리는 작은 바이러스가 세상을 온통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전 세계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감염됐고 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 세상에는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수없이 많지만 그것들보다 ‘코로나19’가 더 특별한 이유는 바로 ‘예외 없음’ 때문이다. 보편적 위험성이랄까! 한마디로 이 바이러스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국가와 인종 등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위험하다. 세계보건기구가 이번 사태를 전염병의 전 세계적 유행 단계를 의미하는 ‘팬데믹pandemic’으로 선언했는데 이 말의 어원이 ‘모든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야말로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거다.

 

예외 없는 위험성이라는 이 사실은 그동안 제각기 능력껏 살아가던 ‘각자 도생’을 당연시해왔던 세상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사태는 어딘가의 재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이곳의 재난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고 나의 비극일 수도 있는, 한마디로 인류의 보편적 재난인 거다. 그 어딘가 혹은 그 누군가가 홀로 극복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예외 없이 모두가 함께 협력하여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공동의 문제라는 뜻이다.

 

인류의 보편적 재난이라!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그동안 우리가 잊고 살아온 ‘보편성’이라는 개념이 다름 아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 안에 다시 떠오르고 있는 거다. 지구, 인류, 이웃, 연대, 공존 등과 같이 ‘보편성’을 내포한 말들은 그동안 그 실질적 의미가 상실된 추상적인 단어에 불과했는데 ‘코로나19’의 예외 없는 위협이 이 말들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각 나라 각 지역 사람들, 그동안은 다른 곳 다른 사람이었던 그들이 이젠 고난을 함께 나누고 공존을 위해 연대하는 지구촌 인류요 이웃으로서 사람들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는 거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멜로드라마 대사 같은 이 말이 이젠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현실이 되었다. 인간이란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엄청난 전염성을 통해 ‘코로나19’가 알려주고 있는 거다.

 

물론 이 와중에도 혼자만의 삶을 추구하며 생필품 사재기에 골몰하는 사람들이 있다. 확진판정 후에도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키거나 공포와 혐오를 조장하면서 이 혼란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아무 조건 없이 도와주면서 이 어려움 속에서도 다 함께 살아 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예외 없는’ 코로나 사태의 참담한 현실이 오히려 ‘동병상련’처럼 인류애적 공감대를 이끌어내어 그동안 잊고 있던 삶의 ‘보편성’ ‘관계성’ ‘공동체성’을 다시 떠올려주고 있는 거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오로지 자기밖에 모른 채 자기에게 잘해주는 이들에게만 잘해주고 자기 맘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며(루카 6,32-34 참조) 이기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항변하듯 던져왔던 질문이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되물으신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7)

 

예수님의 물으심에 그동안은 애써 무시하고 미뤄왔던 대답을 이제야 하고 있는 거다. 내 일이 아니니까 나는 괜찮으니까 난 아닐 테니까 ‘강도 만난 사람’은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해왔던 우리들이(루카 10,31-32 참조)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겨우 깨닫게 된 진짜 해답이다.

 

사실 이 세상에 재난이 어디 ‘코로나19’뿐이던가! 우리가 그냥 지나쳤을 뿐 그보다 더 큰 재난들이 늘 우리 곁에 있어 왔다. 부모에게는 자식의 죽음이, 노동자에게는 해고가, 수험생에게는 탈락이, 가난한 이에게는 비싼 병원비가, 난민들에게는 추방이, 믿었던 이에게는 배신이 곧 죽음보다 더 큰 재앙일 수 있는 거다. 이들이 모두 ‘강도 만난 사람들’이다. 다만 그동안 우리가 무시하고 지나쳐버렸을 뿐이다. 만일 계속해서 우리가 이들을 그냥 지나쳐버린다면 이들은 또 어딘가에서 쓸쓸히 버려지고 죽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정녕 모두를 위한 자비가 필요한 때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착한 사마리아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모두’여야 한다. ‘강도 만난 사람’도 다름 아닌 ‘우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신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마르 14,24)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출처 : 생활성서 202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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