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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은 좀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 이 소설은 1981년 교황 저격 사건(한 터키인 청년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저격한 사건)과 에리직톤의 신화를 모티프로 하여 신앙의 의미를 묻는 작품이다. 작가 이승우는 기독교적 신념을 둘러싸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네 인물의 삶을 통해 신과 인간, 사회의 관계를 차근차근 성찰하고 삶의 구원 문제로까지 우리를 이끌어간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에리직톤’은 신의 나무를 벤 죄로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느끼는 벌을 받는 인물이다. 그는 자기 재산을 모두 먹거리를 구하는 데 써버리고 심지어 자기 딸까지 팔아 먹을 것을 구한다. 그의 배고픔은 자신의 몸을 모두 뜯어먹을 때까지 계속된다. 

 

에리직톤이 벌을 받는 까닭은 무엇인가, 신이 그에게 내린 벌은 정당한가? 이 작품은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작품 속의 등장인물인 신학교 교수의 말처럼 그는 신에게 복종하지 않은, 그래서 당연히 벌 받아야 할 불경한 인물일까. 이러한 견해와 달리 작가는 에리직톤이 ‘신성’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잘못된 구조에 대항하여 외로운 싸움을 벌였던 의인이라고 해석한다.

 

신은 신화를 거부한다. 신화를 창조하고, 신화 속에 안주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다. 신은 인간들의 처소에 인간과 함께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분임을 나는 안다. 따라서 인간적인 관심과 방법은 곧바로 신의 관심과 방법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묵시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중세의 일부 신비주의자들이 그랬고 이 땅의 상당한 종교인들이 답습하고 있는 것처럼 신에게 피신함으로써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환상이다. 신은 피난민을 위해 숙소를 제공하는 자가 아니다. 

 

신은 저 높은 곳에 계시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 있고,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수직적인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의 계율만을 받들고, 그 계율을 조금이라도 어겼을 때 받는 신의 가혹한 형벌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고, 계율을 지킴으로써 구원의 보상을 얻고자 하는 것만이 유일한 신앙생활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 모세와 이집트인, 살인자와 희생자의 이분법은 유지되고 있다. 그 이분법의 구별이 완벽하게 그치는 것은 예수에게 와서이다. 예수는 스스로 죽이고 스스로 죽는다. 어떤 힘도 그를 죽게 할 수 없었다.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예수는 폭력과 희생을 한 몸으로 껴안는다. 그것은 그의 구원의 완성이다. 삶은 총을 똑바로 쏘는 것이다. 

 

수직적인 신앙 구조에 대항해 교황 암살을 시도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마는 형석. 종교적 이상을 추구하여 수녀가 되었다가 사회 현실에 뛰어들면서 종교적 이상과 현실이 맞닿는 지점을 발견하는 혜령. 사회 변혁의 꿈을 꾸며, 사회 현실에서 벗어난 종교에 대해 칼날을 들이대는 태혁. 신학도의 길을 버리고 기자로 일하면서 이들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병욱.

 

이 작품이 종교를 부정한다고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오히려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는 이 네 젊은이들의 성장 이야기이자, 이는 곧 진정한 신앙을 탐색해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독자로 하여금 수직적 신앙과 수평적 신앙의 관계에서 인간은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할지 끊임없이 성찰하게 한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말한다면, 그것은 신의 명령을 기다리는 수직적 삶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정의롭게 행동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삶이 아닐까. 아마 그것이 우리 곁의 신이 바라시는 일일 것이다.   

 

작품 속의 젊은 주인공들이 매력적인 것은 그들의 삶이 ‘총을 똑바로 쏘는 삶’이었다는 점이다. 견고해진 모든 권력이 우리 이웃을 아프게 할 때, 그 권력에 대해 용기 있게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그러한 용기를 지닌 자의 모습이 우리가 찾아야 할 자화상이요, 또 다른 ‘에리직톤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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