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는 일제 강점기에 살다가 28살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친 시인이다. 조국을 잃은 암울한 시기, 식민지 청년의 마음을 위로하고 신념을 지탱해 준 것은 집안 대대로 이어진 기독교 신앙이었다. <십자가>는 제목 그대로 그런 시인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시이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윤동주 <십자가> -
그러나 이 시를 종교적 신앙이라는 액자에만 가두어둘 수는 없다. 이 시에는 참된 삶이란 무엇인지 고뇌하는 불안한 젊은이의 모습이 비쳐지고 있다. 다른 시 작품들에서, 그리고 그의 유고 시집의 제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영혼의 순수함을 지향하였다.
<서시>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소망하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며 자신에게 엄격하였던 시인, 그래서 나는 이 젊은 시인의 세계를 ‘맑음’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다. 티 하나 없이 가장 깨끗한 정신 세계를 추구하였던 것이 그의 삶이었지 않나 싶다.
오늘의 시 <십자가>에서 시인은 예수가 도달한 곳, ‘첨탑’의 높은 세계를 지향하면서도, 감히 오를까 싶어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는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러나 세상의 온갖 더러운 죄악에 괴로워하면서, 그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오롯이 자신을 바친 이가 예수이다. 그래서 예수는 ‘행복’하였고, 시인 역시 그러한 삶이 허락된다면 기꺼이 자신의 피를 바치고자 다짐한다. 그것은 희생의 행위이기에, 어지러운 세상, 어두운 하늘 아래 피어나는 그 피는 ‘꽃처럼’ 아름답다.
우리는 얼마나 신앙의 근원에 가까이 가 있을까. 교리를 지키고, 기도하는 일상이 그 근원의 모습일까. 아이같이 ‘맑고’, ‘가난한’ 마음을 얼마나 지니고 있을까. 신앙의 형식에 앞서서 약한 것을 사랑하고, 아픈 것에 눈물지은 것이 예수의 삶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윤동주는 아이처럼 어리고, 영원히 젊다. 이 땅에는 욕심과 허영심, 미움과 질시의 언어들이 널려 있고, 우리는 그것을 쫓아다니느라 헛되이 늙어 간다. 시인은 시 <병원>에서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고 하였으니, 참된 삶의 태도를 고뇌하고 성찰하는 젊은이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여러 모로 복잡한 시기이다. 이러한 때일수록 하늘을 바라보고, 바람을 느끼고, 별을 사랑하는 여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