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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로 볼 때 현길언의 「사제와 제물」은 노동 소설이다. 우리 사회의 산업 현장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노사 갈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제목처럼 이야기 속에는 사제가 등장한다. 진짜 가톨릭의 사제가 아니라 사제처럼 농성자들을 이끄는 인물이며, 이 인물의  고뇌와 행동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국내에서 대우가 가장 좋다고 평이 나 있는 세웅그룹에서 노조 파업이 일어난다. 노조원들은 빌딩 한 층을 점거하고 물과 전기가 끊긴 상황에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농성을 이어간다. 선우백 선생이 농성장으로 들어간 것은 농성자들을 회유해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 달라는 사측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농성자들과 합류하고 그들이 믿고 의지하는 ‘사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농성 노조원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알리기 위해 현수막, 전단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그러나 언론은 이미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고, 대부분 사람들은 농성 문제에 무관심하다. 그런 상황에 절망하며 ‘이채원’은 대중에게 호소하는 마지막 수단으로 투신자살을 택한다. 

이후 상황은 달라진 듯이 보인다. 그동안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매스컴에서 사건을 집중 보도하고, 사람들은 그들의 농성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으며, 회사측도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이 역시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원래의 무관심 상태로 돌아간다.

 

성서에는 제사장이 자기 자신을 바치거나 자기의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낸 이야기들이 많지요. 아브라함은 백 세에 얻은 외아들을 바쳤습니다. 그러한 제의식은 결국 예수에 와서 완성됩니다. 그는 자기 몸을 바쳐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가장 큰 제사를 치르게 되고 인류의 제사장이 됩니다. 그게 바로 사제의 길이지요. 우리 현실과는 아주 다릅니다. 우리들의 사제는 자신을 제물로 바칠 생각은 않고 다른 데서만, 그것도 약하고 힘없고 한스럽게 살아온 민중들에게만 요구합니다. 더구나 가증스러운 것은 그러한 폭력을 자행하면서도 민중이 역사의 주체 운운하면서 그들을 현혹하여 기꺼이 제물이 되기를 부추긴다는 사실입니다.

 

빌딩을 포위한 진압군들은 투신자살을 막기 위해 매트리스를 까는 등 강제 해산, 강제 연행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대기 상태에 있었고, 두 명의 여성 농성원이 분신을 준비하고 정좌해 있는 상황. 농성장의 ‘사제’인 선우백 선생은 노조위원장 강철규가 한 “사제는 제물을 다른 곳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진실한 의미를 지닌다”는 말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닫는다. 

 

그것은 사제는 없고 제물들만이 있는, 다시 말한다면, 모두가 사제였고 그 사제들은 바로 자신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드린, 바로 시제와 제물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그 많은 젊은이들이 사는 우리 사회는 아주 밝게 빛날 것으로 확신했던 그 기억.

선우백은 창을 뛰어내릴 동작을 하면서 소리질렀다.

“이번에는 내 차례야. 당신들, 물러가지 않으면.”

……

“이제부터 새로운 제사는 시작된다.”

나는 재차 확인하듯이 중얼거리면서 다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가슴이 점점 넓어지면서 그렇게 까마득하게 보이던 거리가, 훌쩍 뛰어내려도 괜찮을 만큼 아주 가깝게 다가왔다.

 

선우백 선생은 이미 4·19 혁명 시절에 ‘진정한 사제의 모습은 무엇인가’ 고민했었던 인물이다. 그는 그 질문에 대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는 답을 얻었고 마지막 순간 그에 따라 행동했다. 

선우백 선생이 진짜 사제가 아니듯 이 작품이 ‘사제’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당연히 ‘사제’는 희생되어 마땅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죽음을 미화하는 것도 아니다. 이 소설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농성장에 내몰린 노동자들처럼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얼마나 ‘사제’의 마음으로 손을 내밀고 있을까. 제물이 된다는 것은 희생이자 사랑의 마음이다. 예수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 스스로 제물이 되어 인류의 제사장이 되었다. 예수는 아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 힘없고 약한 이들을 도우세요. 당신들 모두가 ‘사제’가 되어 자신의 욕심과 이익을 버리고 진정으로 남을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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