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신앙
2021.03.18 15:42

무엇이 신앙인가-최인훈의 『라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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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은정 엘리사벳 교수/경남대

각각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한 랍비 밑에서 공부하고 함께 랍비가 된 친구가 있다. 라울과 바울(사울)이다. 둘의 성격은 정반대여서 라울이 조심성 있고 신앙심이 깊은 반면, 바울은 팔팔하고 조급하고 불성실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가위바위보를 해도 항상 바울이 이기곤 하였듯이 늘 운은 바울 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시험을 앞둔 날 바울은 기도를 올리고는 아무렇게나 펼친 성전의 한 부분만 외우기 시작했다. ‘통밥’으로 딱 찍어서 벼락치기 공부를 한 것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라울은 오기가 나서 딱 그 부분만 빼고 공부했지만 바로 그게 시험에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라울은 ‘신의 사랑’ 앞에서 언제나 바울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삶을 한 치 한 치 세면서 살아가는 자신보다 ‘내기와 우연과 예언’에서는 언제나 바울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나사렛 고을의 천한 목공의 장남’ 예수를 허황된 존재라 하며 그의 무리를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하기를 일삼는다. 반면에 라울은 경전을 공부하면서 나사렛 사람이 다윗의 계보를 잇는 자이며 ‘여호와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대제사장 안나스가 예수를 로마 제국에 대한 모반의 죄로 고발할 것인지 떠보자 그를 만난 적이 없기에 거부한다고 답하기도 한다.  


『광장』으로 잘 알려진 최인훈의 초기작 『라울전』의 내용이다. 이 소설에서 신이 선택한 인물은 누구일까. 나사렛의 아들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라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뜻밖에도 신의 선택은 바울이다. 왜일까. 라울은 지식으로써 예수에게 가까이 갔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라울이 나사렛 사람의 발밑에 엎드리기 위하여는, 단 한 걸음이면 되었고, 그 단 한 걸음은 반드시 필요한 ‘한 걸음’이었다. 라울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곳에 그의 괴로움이 있었다. 눈에 보지 못한 것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라울은 총독의 잔치와 교구장 모임과 제사에 한 번도 빠짐이 없이, 그것이 ‘보여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주저하며 예수를 찾아 나서지 못한 라울과 달리, 바울은 어느 날 총독에게 다음 희생자의 명부를 주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를 만난다. “사울아, 어디로 가느냐”는 말씀에 그는 주의 종이 된다. 주는 하고많은 무리 가운데 죄 많은 자를 골라 가장 귀한 종으로 삼았으니,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제목처럼 라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신앙 앞에서 고뇌하는 우리 인간의 모습과 그 한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신의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라울은 바울이 신을 영접했다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지식과 이성의 틀에 갇힌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것이다. 어려운 주제이기는 하나, 이 소설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서 믿음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뒷날, 측근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슨 말 끝에 라울의 이름이 오고 갔을 때, 바울은 듣고만 있다가 끝에 차디찬 투로 그의 서간에 있는 저 유명한 말을 되풀이한 것이다.
“옹기가 옹기장이더러 나는 왜 이렇게 못나게 빚었느냐고 불평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옹기장이는 자기가 좋아서 못생긴 옹기도 만들고 잘생긴 옹기도 빚는 것이니”라고.

 

 

210321 8면 백그라운드(홈피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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