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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5 16:08

저 산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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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정훈 도미니코 신부

세상살이

그래, 세상의 행복이란 별것인 것 같지만 별것이 아니다. 저렇듯 저녁밥 짓고, 밖에 나간 사람이 무사히 돌아오고, 걱정 없이 잠들면서 하늘에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다. 알겠니?
여인이 보리 이삭을 치마폭에 주워 담으면서 간난이에게 말했다. 나는 새삼스럽게 보리 한 모가지가 이렇게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한 이삭에서 서른 알의 보리가 나온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흘려버린 이삭이 뜻밖의 덕이 된다는 것도 배웠다. 나도 다시 태어난 것 같다. 하늘도 땅도, 풀도 나무도 다 새롭게 보인다. 이제야 세상의 이 모든 것들이 왜 있는지를 안다. 서로를 위해 주기 위해서다.


울지 마라. 이 세상살이란 울다 보면 눈물 마를 새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 왜 우리나라를 일본 사람들이 마음대로 해요? / 우리나라 주권을 일본 사람들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 그런데 왜 그것을 빼앗겼어요? / 우리한테 힘이 없었기 때문이지.


삼촌(수환), 이겼으면서 왜 울어? / 이긴 것도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 / 무슨 소리야? 이기면 좋고 지면 슬픈 건데… / 아니야, 이겨도 슬픈걸. / 바보. / 바보래도 좋아. 난 이제는 다신 안 싸울래.


선생님, 저는 하느님의 아들답게 살려고 공부를 합니다. 신부님께서 그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권을 찾고 싶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함부로 하는 것이 주권을 빼앗겨서 그렇다고. / 자, 오늘은 시간을 바꾼다. 넷째 시간에 있는 보건을 이 시간에 한다. 모두 운동장에 모이도록! 선생님이 막내(수환)에게 말했다. 힘을 키워야 한다. 선생님이 고함을 질렀다. 가슴을 펴라! 소리를 힘껏 내! 하나, 둘, 셋, 넷!


“한”은, ‘억울하게 당함’, ‘잃어버림’에 대한 분함에 매몰되는 감정이 아닙니다. 상대에 대한 증오도 아닙니다. 나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 내가 힘이 없어 당하고 잃었음을 느끼는 안타까움입니다. 그래서 힘을 키우게 합니다. 그러나 상대처럼 물리력을 키우고자 한다면 악순환의 길이 됩니다. 세상 힘이 아닌, 하느님이 주신 존재의 힘, 가슴을 펴고, 나를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나다움’의 힘을 키우도록 해 주는 것이 바로 “한”입니다.


보이는 세상, 보이는 너머 세상
밤에 변소를 간 소년은 무서웠으나 어깨를 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야. 아버지는 감옥도, 고문도, 죽음도 이겨 냈다고 하지 않았는가. …어머니, 나도 마음을 한번 알았어요. 무섭다고 했을 때는 도깨비 울음소리처럼 들리던 바람 소리가 마음을 바꾸니까 천사님 말소리처럼 들리는 것이었어요.


하늘을 보렴. 아래를 보고 건너려면 무섭지만 천주님이 계시는 하늘을 보고 건너면 무섭지 않아.
그날 막내는 하늘을 바라보면 무서울 것이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하늘이 푸르르면 푸르른 대로, 흰 구름이 떠 있으면 떠 있는 대로 하늘은 아늑하기만 했다. 어쩌다 먹구름이 끼고 비바람이 몰려드는 날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그런 날은 하늘을 보면 꾸중하실 때의 아버지 얼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공손해지는 것이었다. 


저는 언젠가 신부님께서 해 주신 강론을 듣고 결심하였습니다. 재물과 생명 둘 중에서 생명을 섬기기로 한 것이지요. 생명을 살리는 소임이 재물이지, 재물을 늘리기 위해 생명을 씁니까?


너희 아버지가 말했단다. 부모란 하느님의 자식을 이 땅에 사는 동안만 맡아 기르는 책임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들 마음에 들게 키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에 들도록 키워야 한다고 했지.


밥을 굶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도 굶어서는 안 된다. 이 에미의 소망이 무언 줄 아느냐? 내가 행상 다니는 것이 어린 너희 형제한테는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내한테는 슬픔 보퉁이이기도 하다. 한 여자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몸에 비단옷 걸친 남들을 볼 때 어찌 부럽지 않겠느냐. 그리고 남의 집 개를 짖게 하고 물건 하나 팔아 달라고 했다가 문전 박대를 당했을 때 어찌 내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겠느냐. 남의 처마 밑에서 하염없이 소낙비를 피할 때도 슬퍼지고 물건을 하나도 팔지 못할 때는 더욱 배가 고파 오지. 그러나 나는 마음이 약해지려 할 때마다 너희 할머니를 생각하곤 했었단다. 나의 이런 서러운 고통쯤이야 너희 할머니에 비하면 지푸라기 한낱 같은 것이라고. 그러고 나서 너희 형제를 떠올리면 힘이 불끈 솟는 것이야. 내한테는 쌀 곳간의 열쇠는 없지만 그것보다 더 자랑스러운 하느님이 좋아하는 아들이 있노라고. 그런데 이 철없는 녀석아, 네 지금 그 꼴이 무엇이냐.
막내는 어머니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어머니의 무명 적삼이 흠뻑 젖도록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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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 너머
어머니, 내 고향은 어디여요? 고향은 포근한 곳이지요? / 그렇게 말한다면 어느 지역이 아니라 네 마음에 있는 곳이 고향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텐데… / 내 마음이 가는 곳이 너무도 많아요. 저기 맑은 개울 속에도, 장다리 꽃밭에도, 도라지 꽃밭에도 가 있구요, 저 산 너머에도 가 있구요, 모르겠어요, 어머니, 그냥 마음이 가고 싶어 해요. 어머니, 이제는 알았어요. 우리 고향은 저 산 너머 하늘나라예요.


너는 혼자서 어디를 가느냐? / 대구에 갑니다. 하느님 공부를 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하느님의 자녀로 돌아오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라 했어요. 미끼는 하느님의 말씀이어요. / 너는 이런 팍팍한 황톳길을 많이 걸어 다니도록 하여라. 사람을 낚고자 한다고 했지 않느냐? 그리고 황톳길에서 우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줄 줄 알아야 하고.   -정채봉, 저 산 너머 (김수환 추기경 어릴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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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봉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곧잘 어제에서 ‘오늘’을 보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습니다만, 내일에서 ‘오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추기경의 말을 떠올립니다. “사람한테는 세 사람의 자기기 있지요. 한 사람은 남이 아는 자기이고, 또 한 사람은 자기가 아는 자기이며, 나머지 한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자기이지요. 바라건대 제가 이 일을 하는 동안 남들이 아는 나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나보다도, 내가 모르는 내가 진실로 나타나서 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것은 신성이기 때문입니다.”


내일에서 오늘을 보고자 하고, 이곳에서 저 산 너머를 보고자 한다면, 자기가 모르는 자기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덧붙임
‘저 산 너머(2020)’ 영화를 개인으로나 공동체로나 먼저 보시면 좋겠습니다. 영화 속 풍경과 옛 분들 삶이 아름답습니다.
영화를 꼭 보고 싶은데 어려우신 분은 iotimanco@cathms.or.kr로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더 깊은 내용을 원하시면 책을 보시면 좋습니다. 책은 교구 성바오로서원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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