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잇고 문화 렛잇비 신앙
2021.06.24 14:53

그리스도 페르소나를 입고자 하는 신학생들에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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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정훈 도미니코 신부

엘리자벳 보글러


난 당신을 이해해요. “존재하기”를 부질없이 꿈꾸고 있죠. 
남들 눈에 비친 모습 말고 당신 그대로의 존재 말이에요. 
매 순간마다 긴장해야 하고, 조심해야 하고.
게다가, 남들과 있을 때의 자신과 혼자일 때의 자신 사이의 괴리. 
현기증과 갈망이 계속되겠죠. 이제는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가식 없는 모습, 조각조각 난 자신을 드러내고, 심지어 사라져 버리고 싶은…


모든 목소리와 몸짓은 거짓이고 가짜, 모든 미소는 사실 찌푸림이고…
자살하는 것? 아뇨! 그건 흉해요. 당신은 안 그럴 거예요.
하지만 움직이길 거부하거나 말을 안 할 수는 있죠. 그럼 최소한 거짓말은 안 해도 되니까.
당신 안에 자신을 가두고 작동을 멈추어 버리는 거죠.
그러면 어떤 연기도 할 필요 없죠. 가식적인 표정도 몸짓도.


하지만… 현실은 그러도록 놔두지 않아요. 지금 숨은 곳은
완벽한 곳이 아니에요.
삶이 여기저기서 밀고 들어올 테고, 당신은 반응할 수밖에 없어요. 
아무도 그게 현실인지 아닌지, 진심인지 거짓인지 묻지 않아요. 
그런 것들은 연극 속에서나 중요한 문제죠. 
사실 연극에서도 그다지…                - 영화, 페르소나. 스웨덴 1966. 잉마르 베리만 감독 -


엘리자벳 보글러, 유명하고 인기 있는 배우입니다. 어느 날 무대 위에서 연기 도중, 갑자기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1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음날 아침 가정부는, 완전히 깬 상태에서 침대에 그냥 누워있는, 물어도 대답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는 엘리자벳을 발견합니다. 그런 상태가 3개월간 계속되었고 정신 검진을 받습니다. 검사 결과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한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런 그에게 ‘알마’라는 이름의 간호사가 배정되었고, 이제 둘은 의사의 권유로 여름 별장으로 가서 지내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불안과, 희망 없는 꿈과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함
파멸에 대한 두려움, 이 세상 삶에 대한 고통스런 깨달음
이러한 것들이 피안의 구원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갉아먹는다.
어둠과 침묵에 맞선 우리 믿음과 의혹의 울부짖음은, 우리가 포기했음을 참담하게 증언하고 있다. 
우리의 지식은 두려움에 떨며 침묵하고 있다는 것을.


알마가 읽어준 책의 내용에 엘리자벳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병원에 있을 때 엘리자벳은 텔레비전 속 장면을 보고 경악한 일이 있습니다. 한 승려가, 한낮 길거리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인신공양하는 장면입니다. 그 승려 앞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다가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립니다.  


엘리자벳에게는 연기가 인생의 전부입니다. 무대 위에서뿐 아니라 삶 자체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배우로서의 모습과 삶을 그는 최선을 다해 연기해 냈고, 만족해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모든 것이 온통 거짓이라고 느낍니다. 그리곤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안 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연기하던 그가, 이제는 아무것도 연기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연기로서가 아닌 진짜로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것은 믿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210627 렛잇고문화-페르소나3(홈피용).jpg


알마


젠장! 참 이상하지 뭐야. 가고 싶으면 어디든 가고,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텐데…
난 칼 헨릭이랑 결혼해서 아이를 몇 낳을 거고, 그 애들을 키우겠지.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마음 푹 놓고 살아도 돼. 좋아하는 일이 있고, 그래서 행복해. 
그것도 좋은 거지. 좀 다른 의미이긴 하지만… 그래도 좋아. 좋다구.


엘리자벳의 이상적이고 숭고해 보이는, 또한 다른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삶과 달리, 자신의 삶은 현실적인 소박한 삶이라 여깁니다. 그런 삶에 알마는 만족하고 행복해합니다. 


내 가장 큰 문제는 게으름을 피우다 나중에 후회하는 거예요.
칼 헨릭은 나더러 야망이 없다고 잔소릴 해요. 몽유병 환자처럼 어슬렁거릴 뿐이라고.
그 말은 부당해요. 시험을 보면 내가 1등이었거든요. 물론 칼은 다른 면을 얘기한 거겠지만요. 


현실적 삶을 살지만, 그렇다고 이상이 없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현실에서 가능한 이상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이런 이상과 현실을 두고, 내 안에서 늘 갈등을 일으킵니다. 


(다른 남자와) 5년 동안 사귀었어요. 
물론 나중엔 그가 싫증을 냈지만, 진심으로 사랑했던 건 확실해요. 첫사랑이었구요.
지금 생각하면 오랜 고통이었던 것 같아요. 
근데 이상하게도 전혀 현실 같지가 않았어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적어도 난 그에게 있어 현실적인 존재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내 고통은 현실이었죠, 확실히.
어찌 보면 고통이란 그런 얘기의 일부죠. 구질구질하지만, 마치 고통은 당연히 따르는 거라는 듯.


이상과 현실의 차이, 이상은 모든 게 장밋빛이지만, 현실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과연, 고통 없는 이상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 현실을 떠난 이상, 고통을 외면하는 이상은, 이미 이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체 없는 로망일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현실을 부정한 로망에 집착합니다. 


엘리자벳 보글러와 알마 


용서와 사랑, 희망과 구원을 연기했던 엘리사벳, 이제 그런 연기하는 삶에는, 용서와 사랑, 희망과 구원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연기 인생을 멈추고, 무기력하고 절망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합니다. 


주어진 현실에서 소박하고 진솔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온 알마, 작은 행복을 꿈꾸고, 그러면서도 때론 일탈도 하며, 자책하고 눈물 흘리는 현실을, 한 걸음 한 걸음 살아나갑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나름, 치열하게 삶을 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이 두 사람 사이 여러 지점 중, 어디쯤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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