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21.09.02 14:45

복음적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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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용태 마태오 신부/ 대전교구

‘가톨릭마산(교구보)’ 9월 5일자부터 매월 첫 주에 월간 생활성서 김용태 신부(대전교구)의 ‘지금 여기-복음의 온도’가 게재됩니다.

 

“싫어요!”


어느 날 아침,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사제관까지 찾아오신 어느 할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 부탁이란 것이 ‘강론을 할 때 듣기 불편한 세상 얘기는 절대로 하지 말고 신자들이 다 좋아할 만한 말만 하라’는 요구였다. 겸손한 사제, 온유한 사제, 양들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쳐야 할 사제이지만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다. 나의 ‘싫다’는 말에 그 할아버지는 한참 동안 소리를 지르다가 떠나가셨다.


‘복음적 자존심’이란 것이 있다.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하는 사제이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짐승의 밥그릇만큼이나 낮아져야 하는 사제이지만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당당해야 하는 것이 있다. 원수에게마저 온유하고 친절해야 할 사제이지만 추상같은 위엄과 매서움으로 지키고 보호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주님의 복음이다. 사제의 자존심은 복음적 자존심이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한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요한 3,16 참조)과 ‘한 자 한 획도 포기될 수 없는 복음적 자존심’(마태 5,18 참조)이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예수님은 죽으셨다. 그렇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마태 16,24 참조) 우리의 삶에도 이 두 가지 모습이 마땅히 자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이란 ‘예루살렘의 당나귀’(마르 11,1-11 참조) 같은 것이 아닐까? 예수님을 등에 모시고 예루살렘 도성으로 들어가는 당나귀, 그 당나귀가 만일 사람들의 환호소리를 듣고는 으스대며 건방을 떤다면 그야말로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사람들의 환호소리 앞에서 도리질을 하며 ‘한갓 동물인 저에게 이러지 마십시오.’ 하고 예수님을 등에 태운 채 사람들을 피해 달아난다면? 그 역시 꼴불견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자신의 등 위에 앉아 계신 예수님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환호가 자신을 향한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인 것이다. 예수님을 등에 모시고 가는 당나귀의 올바른 모습은 겸손함과 당당함이다.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겸손할 수 있고, 자신의 등 위에 계신 분이 주님이심을 알기에 그 걸음걸이가 당당할 수 있다. 당나귀로서의 자신은 낮춰도 등 위에 모신 주님은 결코 낮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마찬가지다. 사제는, 아니 복음을 선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 잘난 맛에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 안의 그리스도를 의식하며 스스로는 겸손하되 복음 선포자로서는 당당하고, 스스로는 가난하되 은총의 전달자로서는 부유하며, 스스로는 온유하되 복음의 수호자로서는 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오로의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란 말씀을 내세우며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말과 반길 만한 행동을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사도 바오로의 그다음 말씀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신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3) 결국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은 복음을 모든 사람들 입맛에 맞춘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절대불변의 복음적 가치에 모든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그들이 있는 모든 자리에 복음으로서 함께함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된 지 벌써 이천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세월 동안 세상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신자들은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늘어났다. 그렇다면 세상은 그만큼 복음화되었을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만큼 세상에는 복음과는 거리가 먼 모습들이 만연하다. 우리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자존심도 없는 인간’이란 소리는 듣기 싫어하면서 ‘복음적 자존심도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모습들! ‘세상에 불을 질러야 할 복음’(루카 12,49 참조)이 우리의 삶 속에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아 미지근한 것’(묵시 3,15-16 참조)으로 변해버리고 ‘세상에 칼이 되어야 할 복음’(마태 10,34 참조)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는, 그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로워야 할 말씀’(히브 4,12 참조)이 우리의 삶 속에서 무딜 대로 무디어져 ‘돼지도 짓밟고 물어뜯을’(마태 7,6 참조) 정도가 되어버렸다. 스스로 복음 선포자라 자처하지만 그 삶 어디에도 불을 담을 만한 뜨거움도 없고 칼을 담을 만한 날카로움도 없다. 그렇게 미지근하고 무뎌져 이제는 더 이상 복음이 아니요 한낱 ‘듣기 좋은 말’에 불과한 것을 사람들은 구원의 복음인 양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이 시대, 교회는 많은데 구원은 부족하고 말씀은 난무하는데 복음은 희귀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가 있겠는가?”(요한 6,60)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듣기 좋게 당신의 말씀을 바꾸시지 않는다. 결국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나간다(요한 6,66 참조).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루카 13,31)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충고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복음적 자존심을 지키는 삶이란 이처럼 끝내 죽어야 하는 삶이다. 이 시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적 자존심을 버리는 이유 역시 죽고 싶지 않아서인 거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단히 약속하신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그러고 보면 박해는 사라지고 신앙은 자유롭지만 여전히 우리는 순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 묻는다. “당신은 천주교인이오?” 이 질문에 우리는 복음적 자존심을 한껏 들어 높이며 이렇게 답해야 한다. “보면 모르오?” 정녕 자존심이란 입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10905 4면 문화읽기(홈피용).jpg

 

출처 : 월간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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