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칼럼
2020.11.25 11:02

빈 무덤 안에서 보내는 사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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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민아 마리아 교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COVID-19)의 본격적인 유행과 더불어 미사가 잠정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따라서 우리는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아주 특별한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다.

마치 그이의 몸이 사라진 빈 무덤 안에 들어와 기약 없는 새벽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감염의 공포가 내려 앉은 어두운 무덤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어루만질 수도, 얼굴을 맞댈 수도, 밥상을 마주할 수도 없다.

긴 시간 홀로 암흑을 대면해 본 이들은 알 것이다.

빛이 사라진 적막한 공간 속에 침잠하면 민망할 만큼 낱낱이 들여다 보이는 것은 나 자신이다.

어쩌면 이 시기는 빛의 저편에 숨어 있던 우리 내면의 어둠을 비로소 응시하게 하는 깊은 초대인지도 모른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이가 묻힌 그날, 죽음을 목도한 이들의 가슴속에도 감염증이 지나간 텅 빈 거리처럼 무거운 침묵이 흘렀을 것이다.

그들은 슬픔과 수치와 두려움에 눌려 몸을 숙이고, 오늘 우리처럼 낱낱이 드러나는 자신의 어둠과 마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시간 그이는 흉터 가득한 몸을 끌고 무덤을 떠나 어딘가로 향한다.

가톨릭 사도신경의 한글 번역은 ‘저승’에 간 것으로 전하는데, 이 ‘저승’이라는 구절을 자세히 들여다 보자.

‘저승에 가시어’라는 표현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사도신경은 “κατελθόντα εἰς τὰ κατώτατα”로, 직역하면 “낮은 자들(κατώτατα)에게 가시어”다.

즉, 장소 개념이 없다.

라틴어 번역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여 ‘inferna’ 혹은 ‘infernum’ 등 저승으로 번역되는 장소 개념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트렌트 공의회를 통해 바티칸에서 인정한 표현은 ‘descendit ad inferos’로, 그리스어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낮은 자들(inferos)에게 가시어’로 해석된다.

한글과 영어를 비롯한 많은 번역에서 굳이 장소 개념을 차용하는 이유는 히브리 성서와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셰올, 하데스 등 사후세계 개념과 맥락을 맞추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원래의 의미에 가까운 번역에 따르자면 그 밤, 숨 막힐 듯한 적막 속에서 그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1베드 4, 6) 향한 곳은

땅밑 어딘가에 위치한 저승이 아니라 낮은 사람들, 천대와 괄시 끝에 버림받은 가난하고 여윈 사람들이다.

하긴 아직 살아있으되 채 살지 못하는 이들, 이미 죽었으되 차마 죽지 못한 이들이 사는 곳은 삶과 죽음이 겹친 곳, 림보(limbo, 古聖所) 혹은 저승과 다름 없을 것이다.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성토요일 옛 전례문에 따르면, 무덤을 비운 밤과 낮 그이는 가장 낮은 이들에게 내려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의 손을 잡고 일으키며 이렇게 말한다.

“자는 자여 깨어나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라. 내가 네게 빛을 주리라.” 

 

감염증의 첫 희생자가 된 고인을 우리는 청도 대남병원의 ‘무연고자 A씨’로 기억한다.

정신병원 폐쇄병동에서 살아있으되 살지 못했던 A씨와 다른 여섯 명은 고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무연고자’들로 우리의 기억에 남았다.

그들은 감염증의 희생자이기 이전에 차별과 혐오의 희생자들이다.

우리 사회가 만든 림보에 갇혀 자신의 한평생을 거부 당하고도 부당하다는 말 한마디 못한 채 결국 죽음을 맞았다.

그들이 고열과 기침으로 죽어가던 날 조차 우리는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책임을 전가했지만,

그이는 묻히던 그날처럼 무덤을 떠나 바로 그 낮은 곳 낮은 이들, 대남병원의 무연고자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에서처럼 무릎을 꿇고 팔을 뻗쳐 쓸쓸한 이들의 영혼을 건져 올렸을 것이다.

너무 늦게 우리에게 들려온 ‘무연고자’라는 가련한 이름은 어쩌면 그들이 림보에서 올라와

그의 가슴에 안기는 순간 터져 나온 가느다란 탄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연고자’, 그 이름이 이제 우리에게 닿아 어떤 의미가 되기를 요구한다.  

혐오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감염증 확산과 더불어 더욱 심각하게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병폐는 혐오다.

초기에는 중국인들과 재한 중국인들을 공략하던 혐오가 요즈음에는 특정 종교와 관련된 이들을 향하고 있다.

물론,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책임을 방기한 채 불합리하고 비겁한 행동을 한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잘못을 따지기 앞서 안타깝고 부끄럽다.

그 종교를 믿는 대다수의 신자들이 다니던 교회에 실망하거나, 혹은 신앙적 호기심과 열정을 발산할 곳을 찾다

결국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또 그 많은 이들이 그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이유가 사람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배려에 감동해서였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왜 우리는 그들의 호기심과 열정을 품지 못 했으며, 그들의 외로움을 보지 못했을까?

이제 우리가 그들을 더 혐오하고 배제하고 고립시킨다면 그들은 결국 유령처럼 사회의 낮은 곳를 떠돌다 그들만의 림보에 영영 갇혀버릴지 모른다.

 

대남병원의 무연고자들과 신천지는 모습은 다르지만 둘다 빈 무덤의 어둠 속으로 소환된 우리 자신의 그림자요, 어둠이다.

우리의 혐오, 차별, 배제가 사회의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낮은 자들의 삶을 파괴하다

이제 이 빈 무덤의 시간에 당황스러울 만큼 많은 숫자의 죽은 영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숫자로 말이다.

이 빈 무덤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둠과 그림자를 마주하지 못한다면,

찍어 내고 도려내기보다 성찰하고 치료하지 않는다면, 파스카의 새벽이 밝아 다시 제대 앞으로 모인다 할지라도 그이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무덤을 비운 채 어둠과 죽음의 그늘 가운데 살아가는 잃어 버린 양들을 찾고 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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