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칼럼
2020.11.25 11:04

마지막 때와 다가올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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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민아 마리아 교수/ 조지타운대학교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은 더이상 우리 곁에 없을 것이다. 한솥밥 해먹고 어깨 걸고 뒹굴며 목청껏 노래 부르고 침 튀겨 싸우기도 해야 내남없이 친해지는 줄 알던 시대는 이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사랑, 우정, 친구, 이웃, 자매, 형제, 동료, 동지, 우리가 품어 온 이 관계의 형상들에 배어 있는 질척한 몸성을 생각한다면 새로운 주류가 될 듯한 비대면 문화의 건조함이 디스토피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코비드-19 이후의 세상을 암울하게만 전망하고 싶지 않지만, 준비 없이 다가온 이 전지구적인 변화가 모두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한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생각과 판단과 행동 체계가 흔들리는 상황이 오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담론이 있다. 종말론이다.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코비드-19를 종말론적 심판, 신의 리셋divine reset, 말세의 징조, 마지막 때를 위한 섭리 등으로 해석하여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신자들을 선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톨릭 신학은 종말론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종말론eschatology의 어원인 그리스어 에스카토스ἔσχατος는 마지막 사건, 마지막 때, 가장 먼 시간과 공간을 뜻하는 단어인데 한국어로 번역되며 시간성이 강조되었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특히 인생과 세상의 마지막 사건들인 죽음, 심판, 천국, 지옥을 다룬다. 종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성서에서 조차 불분명하다. 최후 심판, 그리스도의 재림 약속, 천년 왕국, 새하늘 새땅, 천국과 연옥, 지옥 등, 종말론의 의미를 구성하는 사건들이 모두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후 심판을 통해 선한 이들은 영이 되어 천국에 남아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악인은 지옥에 떨어져 육체의 고통을 받으며 영원한 심판을 받는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종말론은 성 아우구스티노(354-430)가 그 체계를 마련했다. 삶과 죽음의 단절, 선과 악의 대립, 구원과 징벌 등 이원론적 구조가 그 특징이다. 불세출의 수사학자였던 아우구스티노는 시간, 영원, 은총 등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에 수려하고 장엄한 언어를 입혔지만, 그의 신학과 글은 그가 책임을 지고 관여했던 교회 안팎의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아우구스티노가 살았던 3-4세기는 박해가 종식되어 그리스도교가 제국 로마의 보호를 받기 시작한 시기이다. 교회는 공고한 제도를 구축하기 위해 숱한 교리 논쟁과 이단 논쟁을 통해 옳은 관점과 그른 관점을 나누어 신학을 구획화 하는데, 이때 정통과 이단 분류의 기준이 되었던 것은 주교들을 중심으로 하는 보편교회의 질서 유지와 내적 결속이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 작업의 최전방에 있었던 인물이고, 그의 이원론적인 종말론은 당시 교회의 상황과 필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원론적 종말론은 중세를 거치며 점점 현실과의 접점을 잃고,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사건 혹은 죽음 이후에 인간이 겪게 될 사건들에 대한 환상으로 위로를 주거나 공포를 자극하는 판타지 영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성 이레네오(130-202), 알렉산드리아의 성 끌레멘스(150-215), 오리게네스(185-254) 등, 아우구스티노 이전의 탁월한 교부들과 신학자들의 종말론은 이원론적 세계관이 아니라 통합적 세계관에 기반한다. 이들의 시간 개념은 순환적이다. 창조와 종말, 처음과 마지막이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만난다. 그러기에 단절이 아니라 연속, 심판이 아니라 회개, 징벌이 아니라 회복의 메시지가 종말론의 중심에 있다. 마치 교향곡 서곡에 등장하는 테마가 몇개의 악장들을 관통하며 대단원에 이르러 전체를 하나의 의미로 아우르듯,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의도하셨던 계획, 즉 당신이 만든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당신의 품으로 다시 불러들이시는 크신 사랑이 인간의 역사를 거쳐 표현되다 결국 완성에 이르는 우주적 화해의 과정이 종말인 것이다. 그리고 이 원대한 종말의 교향곡에는 비그리스도인을 포함하는 모든 인간과, 생물과 미생물까지 모든 피조물이 참여하여 화음을 이루는 상생의 비전이 포함되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현대신학의 종말론은 대부분 아우구스티노 이전 교부들의 통합적 비전을 공유하며, 한편으로는 예수를 통해 이미 경험한 역사 속에서의 하느님 나라 체험을 강조한다. 종말을 통해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는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떠난 이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죽은 영들을 위로하고, 멸시 받는 이들을 환대하고, 가난한 이들의 존엄성을 일깨운 예수의 복음 선포를 통해 이미 역사 속에서 발현되었다. 그러므로 종말은 죽음 이후 혹은 마지막 때에 갑자기 일어날 사건이라기보다 우리가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환기해야 할 기억의 대상이며 경험의 대상이다. 내가 삶을 살아가는 매 순간 내리는 선택은 마지막 순간 하느님께 제출되는 보고서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다. 그 선택은 지금도 진행 중인 하느님의 종말적 비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그 과정을 앞당길 수도 더디게 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종말은 언제나 ‘이미와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긴장 속에 현존한다. 영원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 가는 것이며, 언제나 과정 중에 있다. 

 

부서진 세상에서 경험하는 ‘이미와 아직 사이’ 하느님 나라는 강렬하지만 아스라하다. 그러기에 늘 안타까운 목마름이다. 브라질의 신학자 이본느 게바라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갈증을 한잔의 물에 비유했다. 지독하게 더운 여름날 한잔의 물은 목마름을 가시게 하지만, 이내 더 타는 듯한 갈증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한잔의 물에 대한 기억과 갈망으로 우리는 우물을 만들고 수로를 놓는다. 엄한 폭력의 세상 속에서 경험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그렇다. 생필품을 훔치다 붙잡힌 부자 앞에 수줍게 돈봉투를 놓고 간 익명의 손길에서, 독거 노인의 집 앞에 말 없이 놓인 식료품 박스에서, 고공 철탑 위 해고 노동자에게 올리는 연대의 손길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여전히 기억하는 노란 리본이 달린 무심한 손가방에서 우리는 짧고 강렬하게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지만, 그 기억은 시인의 노래 속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 순간의 경험으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고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 붓는다.” 하느님 나라가 멀고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또다른 희망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가올 미래도 그렇다. 두렵고 불안하지만 하느님의 회복과 상생의 역사를 단절시킬 미래는 없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기억으로, 그 안에서 나누었던 뜨거웠던 사람의 기억으로, 체온을 나눌 수 없기에 더 끈끈하게 관계를 이어가며, 미래는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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