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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민아 마리아 교수/ 조지타운대학교

몇 년 전 미국 시카고에 살던 때, 노숙인 재활센터 두 곳에서 각기 한 학기 일정으로 신학과 영성 워크숍을 진행했었다. 내게는 그 시간들이 신학자로서 무엇을 질문해야 하고, 어떻게 접근해야 하며,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지, 이전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게 된 너무도 고맙고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삶에 - 특히 가난한 이들의 삶에 - 뿌리를 대는 기쁜 소식이다. 그 소식을 감싸는 언어도 가난한 이들의 삶에서 길어 올려져야 하며 그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전에 그저 머리로 알았을 뿐인 그 진리를, 나는 그때 마음으로 깨달았다. 


노숙인들과 만나던 첫날, 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사용했던 내용을 쉽게 정리해 ‘강의’를 준비해갔다. 당황했다. 내가 사용하는 개념어들은 그들에게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였고, 누구나 알고 있는 줄 알았기에 질문조차 던지지 않았던 교회 용어들은 그들의 삶과 괴리된 껍데기에 불과했다. 의미소를 이루는 단어가 생경한데 내용이 아무리 의미 있다 한들 전달될 리 만무했다. 두 번째 시간부터는 가르치고 정보를 전달하려 했던 내 욕심을 접고, 우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한없이 이어지고 펼쳐지는 주제가 감당이 안 되어, 나름 고안해낸 방식이 일상어로 쉽게 쓰여진 시를 화두로 삼아 함께 나눈 후, 시가 떠올린 자신의 이야기를 각자 종이에 적어 나누어 보도록 하는 것이었다. 반신반의하며 시험 삼아 던져 보았던 이 시도가 괜찮았던 모양이다. 들어주는 이 아무도 없어 고함이나 욕지기로만 터져 나오곤 했던 그들의 이야기가 말이 되어, 그림이 되어, 시가 되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종이에 적은 글들을 나누고 싶어 수줍게 손을 드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던 날들의 흥분과 감동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존재의 집’인 언어는 사람의 삶으로 빚어진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들과 만나야 하고, 삶을 나누어야 하고, 그들의 언어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는 당신의 강론에 가난한 이들의 일상이 담긴 비유를 사용했다. 그들의 마음에 당장 그림이 그려지고 손과 발의 감각이 떠올려지는 언어를 사용해 하느님 나라 이야기를 풀어 낸 것이다.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떠오른 표현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일상을 함께 하고 몸으로 체험하여 만들어낸 비유들이었을 것이다. 밭의 겨자풀과 부엌의 누룩 빵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했던 예수는 마치 시인이 소박한 일상에서 신박한 은유를 건져낸 것처럼 설레고 기뻐하며 사람들에게 이야기로 풀어낼 시간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겨자씨를 밭에 심으면 잡초처럼 쑥쑥 자라 다른 식물을 덮을 정도로 무성해진다는 것을 알았던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는, 그이가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했을 때 겨자나무처럼 거침없이 하느님 나라가 그려졌을 것이다. 한 끼 한 끼가 소중했기에 아주 작은 양의 누룩으로 식구들이 함께 나눌 넉넉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떡을 만들어 내는 기쁨을 알았던 그들의 혀끝에는, 그이가 하느님 나라를 누룩에 비유했을 때 하느님 나라가 떡의 향기처럼 퍼졌을 것이다. 예수의 강론은 가난한 이들의 삶을 담았기에 삶의 복음으로 선포될 수 있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언어를, 또 그 언어가 그려내는 비전과 상상력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께 말하고 나누고 꿈꾸며, 함께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천주교가 어렵다고 하는 분들 중에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분들을 많이 보았다. 연륜이 오랜 신자들 만이 알아들 수 있는 낯선 단어들이 아직도 교회의 공식 비공식의 용어로 사용되는 예가 많다. 교리는 더더욱 그렇다. 오랜 신자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교리들이 기계적인 언어로 전달되는 교리 교육은 어렵고 지루하다. 달달 외운다 한들 생활에 뿌리내리지 못한다. 코로나19 때문에 본당의 활동이 축소되고 미사마저 제한되는 요즘, 교회의 미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전망과 예측이 분분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회의 변화와 개혁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포스트’ 코로나19 시대를 준비하며 신앙 공동체를 새롭게 구상해야 할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과거의 습관 너머를 보게 하는 새로운 상상력이다. 그 상상력을 표현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사용하는 언어도 점검해야 한다. 신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들, 신자들의 귀에조차 어려운 교리들은 교회를 더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집단으로 만든다. ‘접촉’이 제한되는 요즘, 교회 안팎 이웃들의 삶을 살펴 교회의 언어를 점검하고 수정하고 보완하여, 말을 통해 삶을 어루만지는 ‘접촉’을 늘려 보면 어떨까. 그리하여 언젠가는 교회의 언어가 신자들뿐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의 삶까지 넉넉히 담아내는, 표현할 언어가 없어 한이 되는 그들의 고통을 품어 내고 풀어내는 집이 되고 실이 된다면 어떨까.


그러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얼마 전 들은 좋은 소식이 참고가 될 것 같다.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명동성당에 무료급식소 ‘명동밥집’을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명동밥집은 서울 남대문, 을지로, 종로 일대의 노숙인들과 홀몸 노인 등 소외된 이들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하고 여러 기관의 도움을 받아 긴급 의료나 생필품 제공, 심리 상담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사 참조).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포장 도시락을 나누어 주고 있지만, 거리두기 단계가 완화되면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조리한 따뜻한 음식을 제공할 예정이라 한다. 밥을 먹으러 오는 노숙인 수 이상으로 봉사자 수가 많다 하고, 신자들 사이엔 주교좌 성당이 지저분해진다는 불평보다 “이제야 교회가 교회다워졌다”는 호응이 더 많다 한다. 교회가 운영하는 무료 밥집이 이미 여러 군데 있지만, 주교좌 성당에 노숙인을 위한 밥집을 연 것은 의미가 깊다. 다른 교구들도 이런 시도들을 하며 소외된 이웃들과 만나고 그들의 말을 듣는 계기들을 많이 만들면 좋겠다. 가난한 이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교회만이 그들의 말로 대화할 수 있다. 들을 수 있는 교회만이 변화할 수 있다.

 

도시락과 양말 등을 준비하고, 밥집 손님을 기다리는 봉사자들과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직원들
구 계성여고 마당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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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진 기자/ 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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