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칼럼
2021.06.17 14:42

사각지대와 국외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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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민아 마리아 교수/ 조지타운대학교

어느덧 20년 넘게 타향에서 살고 있는 내게 방학 휴가를 틈탄 고향 방문은 설렘 가득한 축복이다. 그립고 보고 싶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날 기쁨으로, 강 따라 고즈넉이 펼쳐지는 우리 산하의 능선을 눈에 담고 발로 걸을 기대로,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변할 줄 모르는 토종 입맛을 당기는 맛집을 찾아다닐 생각으로, 휴가가 시작되기 몇 주 전부터 마음이 부풀고 행복해지곤 한다. 막상 도착하면 해마다 조금씩 변해 있는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하루 이틀 지날수록 이제는 여행자로, 혹은 손님으로 고향에 머물고 있다는 현실이 일깨워져 한 켠 외로워지기도 하지만, 또 그 덕에 정착민은 잘 보고 겪지 못하는 사회의 균열된 지점들을 발견하게 되고, 국외자들을 향한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한다. 


바로 일주일 전에 인천 공항에 내린 이후 자가격리를 하면서 나는 고향의 낯섦을 어느 해보다도 실감하고 있다. 스마트폰 기종이 매우 낡아 전화로 사용할 수 없고, 국내 발급 카드가 없는 까닭에 자가격리와는 별도로 ‘고립’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거의 모든 구매가 국내 발급 카드를 통해 결제가 이루어지고, 또 스마트폰을 통해 본인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하기에, 그 두 가지가 없는 나는 음식을 배달 시킬 수도, 간단한 생필품을 구입할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던져지고 말았다. 부모님들 또한 디지털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으시니 원거리에서 홀로 격리 중인 나를 도울 길이 없어 안타까워하셨다. 물론 팬데믹 탓이 크지만, 사실 이 거리감은 몇 해 전부터 서서히 느껴오던 것이다. 생활 반경의 디지털화는 그 시스템 안에 들어 있는 이들에게는 물과 공기처럼 익숙하고 편하지만, 나 같은 이방인이나 혹은 주민임에도 불구하고 문화, 경제, 언어, 신체, 연령 등 다양한 이유로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국외자들에게는 사소한 일 처리도 까다롭고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불친절한 사각지대를 조성한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이전엔 손품 발품 팔아 해결할 수 있었던 상황들마저 팬데믹으로 인해 봉쇄되어 사람들이 시스템 뒤로 숨어 버리자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아예 없어져 버린 것이다. 참으로 고맙게도, 아껴 주시는 벗들과 가족의 도움 덕에 결코 부족함 없는 격리 기간을 보내게 되었지만, 그 짧은 며칠 동안에도 이렇듯 아찔한 경험을, 디지털 문화뿐 아니라 소위 “정상, 보편, 상식”을 기준 삼아 작동하는 모든 시스템 밖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팬데믹 시대를 지나며 겪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하다. 


팬데믹은 실로 우리 사회의 많은 사각지대를 노출시켰다. 물론 종식이 되려면 아직도 먼 길을 가야 하겠지만 백신 보급으로 인해 조금씩 숨통이 트여가는 현실이 반갑고 고마운 한편, 이제껏 노출된 사회의 취약한 지점들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우려가 되기도 한다. “정상, 보편, 상식”의 범위에 포함되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시스템을 더 공고하게 만들고,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적응 만을 강요하게 되지는 않을까. 원인을 분석하고 불편을 헤아리기 보다 메꾸고 봉합하기 급급해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의 기회조차 함께 묻어 버리지는 않을까. 


역사적으로 팬데믹은 병이 관통하던 시기뿐 아니라 그 이후의 사회에도 큰 위기를 불러왔다. 스페인 독감이 전횡했던 1918년의 이듬해, 미국은 ‘붉은 여름’이라 이름 붙은 폭력의 계절을 맞았다. 생존을 위해 다 같이 힘을 모아야 했던 사회적 협력이 느슨해지고, 병의 종식이라는 확실한 목표와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폐허가 된 삶과 쉽게 회복되지 않는 경기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불안과 분노였다. 게다가 긴 시간 사람들과 건강한 만남을 하지 못했던 탓에 쌓인 스트레스와 심리적 불균형으로 인해 사소한 말다툼과 마찰조차 쉽게 집단 폭력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가장 위협을 받는 이들은 제거되거나 상해를 입어도 주류 시스템에 교란을 일으키지 않을 취약 계층들과 타자들이다. 백인들은 징벌을 내리듯, 마침 새로운 지역으로 유입하기 시작했던 흑인들을 표적 삼아 때리고 살해하고 약탈하는 폭력을 행사했다. 이는 2년 후 미국 인종 차별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사건, 1박 2일 동안 백인들이 흑인들의 집단 거주지에 쳐들어가 흑인 수백 명을 죽이고 다치게 한 털사 인종 학살Tulsa race massacre로 이어진다. 한마을이 온통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하여 그 계절의 이름이 ‘붉은 여름’이다. 


우리는 모두 마스크를 벗고 일상으로 돌아갈 날을 애타게 기다리지만, 사실 그 흥겹고 설레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뜨고 마음을 다잡고 주변을 둘러 ‘사람’을 살펴야 할 것이다. 대면 회합을 앞두고 교회가 지금부터 염두에 두어야 할 일 중 하나다. 병균이 아닌 사람이 사람을 해하고, 사회의 외곽과 주변에 존재하는 이들의 삶을 지우고 파괴해 버릴 폭력의 계절은 어쩌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지 모른다.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친숙한 ‘이웃’의 범주 밖 보이지 않는 이들, 혹은 보여서 불편한 이들에게는 사회와 공동체의 생존, 회복이란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한다. 그 옛날 십자가 형장에서 예수와 바라빠를 앞에 두고 그들에게 더 익숙했던 종교 민족주의 정치 지도자 바라빠를 선택하며 예수를 버렸던 유대 민중들처럼 말이다. 빌라도는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안다. 그의 피에 우리의 책임이 있음을. 그리고 모든 생명에 우리의 책임이 있음을. 

 

210620 4면 지평과초월(홈피용).jpg

1921년 털사 인종 학살로 폐허가 된 현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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