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칼럼
2021.07.15 14:32

하느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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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민아 마리아 교수/ 조지타운대학교

언제 끝나기는 할까. 코로나19 방역 4단계 격상이 결정되면서 다시 위기가 시작되었다. 소상공인, 자영업자들, 중소기업은 처진 어깨를 추스르기도 전에 또다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의 여름을 보내게 되었다. 재난이 닥쳐올 때 늘 던지는 질문이 있다. 왜 하느님은 침묵하시는가? 왜 하느님은 이 미증유의 고통에 아무런 행동도 보이시지 않는가? 이 질문을 좀 바꾸어 생각해 보고 싶다. 왜 우리는 침묵이 하느님의 언어요, 하느님의 소통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성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말과 같은 형태의 말일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수많은 이콘과 벽화, 스테인드글라스의 주제가 되었던 수태고지. 하느님의 말씀 자체인 그리스도가 인간에게로 강생하리라는 것을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고한다. 그런데, 대천사가 정말 ‘말’을 했을까? 어쩌면 천사와 마리아 사이엔 말 대신 심연과 같은 신비한 고요만이 흐르고 마리아는 그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듣고, 아니 하느님의 침묵을 잉태하여 그리스도를 낳게 된 것은 아닐까? 빛으로 다가온 천사를 경이로운 눈으로 마주하고 있는, 미국의 흑인 화가 헨리 오싸와 태너Henry Ossawa Tanner의 그림 <수태고지>의 성모님을 보라. 

 

210718 지평과초월(홈피용).jpg

Henry Ossawa Tanner <The Annunciation>


그러고 보면 침묵은 하느님을 많이 닮았다. 침묵은 그 존재와 목적과 활동이 하나다. 마치 하느님의 존재와 목적과 활동이 분리될 수 없듯이 말이다. 침묵은 자신의 존재를 깨뜨려 말이 비롯되게 하며, 자신의 존재와 힘을 통해 다른 것들을 드러낸다. 하느님이 당신의 존재를 나누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힘을 통해 생명들을 살아있게 하시는 것처럼 말이다. 침묵은 하느님이 처음과 나중을 주관하시듯, 인간의 모든 말과 행위의 맨 처음이며 맨 마지막에 존재한다. 인간은 침묵을 통해서 창조 전의 시간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침묵으로 마침내 최후에 이른다. 침묵은 항상 인간을 위해 준비되어 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유일한 존재이며, 유일한 현상이다. 침묵처럼 그렇게 어느 순간에나 다른 것을 위해 존재하고 활동하는 이는 하느님뿐이다. 


하느님이 소통하시는 방법을 분명한 말씀으로만, 분명한 징표로만 생각하고 기대한다면 고통의 자리에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으시는 듯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말과 논리와 이성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소통하시는, 늘 우리 곁에 있는 하느님의 침묵을 우리는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하느님의 침묵을 통해 우리는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예언자 엘리야는 하느님의 침묵을 들은 사람이다(1열왕 19,1-13). 아합왕 무리들과의 오랜 싸움과 이스라엘 민중들의 계속되는 반목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늙은 예언자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통곡한다. 죽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으니 죽여달라고 기도한다. 하느님은 우선 천사를 보내어 엘리야가 기력을 회복하도록 보살피신 후 그를 호렙산으로 부르신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았던 호렙산에 오르며 엘리야는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분명한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느님은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의 위력을 보여주시지만, 그 가운데 계시지는 않았다. 그 웅장한 소리들 대신, 하느님은 “조용하고 여린 소리”로 당신을 드러내셨다(19,13). 공동번역의 “조용하고 여린 소리”는 원어인 히브리어로는 “ קול דממה דקה”(콜 드마마 다카)로 “가늘고 낮게 읊조리는 소리”를 뜻한다. 영어로는 번역이 다양한데,  “부드러운 속삭임(a gentle whisper)” (NIV), “잔잔하고 작은 목소리(a still small voice)” (KJV), “순전한 침묵의 소리(a sound of sheer silence)” (NRSV) 등으로 옮기고 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히브리어 “읊조리고 웅얼거리는” 등의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דממה”(드마마)이다. 이 단어의 뿌리는 우가릿어인데, 짐승이나 사람이 소리를 낮추고 슬퍼하며 애도하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라 한다. 새끼를 잃은 어미 개가 자리를 뜨지 못하고 끄응 끄응 신음하는 소리랄까? 황망한 슬픔 앞에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억누르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낮게 꺼억꺼억 우는 모습이랄까?


분명한 답을 원하며 읍소하는 예언자 엘리야에게 하느님은, 바로 이 조용하고 여린 소리로, 낮게 흐느끼는 소리로, 침묵의 소리로 물으신다.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느님의 침묵을 들은 엘리야는 그 자리에서는 그분의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이내 이어진 엘리야의 행보가 흥미롭다. 이스라엘의 미래를 어깨에 짊어지고 홀로 분투하던, “나 혼자 남았다.”고 하느님께 울부짖던 엘리야는, 침묵의 소리로 소통하시는 하느님을 들은 후 길을 떠나 예후와 엘리사를 세워 그가 가진 권위를 나눈다. 침묵의 하느님은 어쩌면, 자기 자신의 목소리만 듣고 있던 엘리야의 마음과 귀를 열어 다른 이들과 연결하고 소통하게 하셨던 건 아닐까?


소리를 낮추시는 이 침묵의 하느님은, 말씀의 현현만을 기대하는 우리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성서의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만나볼 수 있다. 시체가 되어 땅에 묻힌 아벨의 울부짖음을 전달하신 하느님은 어떨까. 어쩌면 하느님이 아벨의 피의 소리를 ‘전달’ 하신 방법은, 당신의 목소리를 낮추고 천지사방의 소리 또한 잠잠케 하여, 쓸쓸하고 무섭고 슬프고 억울하게 죽은 아벨의 목소리가 온 우주에 공명이 되도록 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 도저한 침묵 속에서 망자의 흐느낌만 울려 퍼지게 하여, 동생을 살해하고도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한 카인이 악귀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하신 건 아닐까.


흔히들 고통의 현장에서 침묵은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되곤 한다. 강요된 침묵, 혹은 이웃을 외면하고 살길을 도모하기 위한 침묵, 홀로 침잠하여 개인의 평안 만을 구하는 침묵 말이다. 이렇듯 침묵을 고통과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고통의 현장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침묵은 무능력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책임 유기로 느껴진다. 그러나 침묵을 당신의 존재를 떼어 생명을 내신 하느님, 당신의 힘을 비워 가난한 이들을 들어 올리신 하느님의 현존이라 생각한다면 어떨까.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늘 계시기에 오히려 드러나지 않는 하느님의 항상성이라 생각한다면 어떨까.


침묵으로 소통하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길은 침묵이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내려놓음으로써, 당신의 존재를 비워 ‘조용하고 여린’ 생명의 소리와 고통의 소리를 듣게 하시는 하느님의 침묵에 참여할 수 있다. 이렇게 침묵에 기반한 영성은,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현장에 밀착되었을 때, 가장 가까이 있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자기 비움의 영성이다. 우리의 말을 내려놓고, 내면의 소음조차 끄고 그 자리에 말 없으신 하느님과 말을 잃은 이웃을 채우는 영성이다. 이 침묵의 영성은, 단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분리되어 있는 우리의 자아를 거두어 냄으로써 하느님을 드러내는 영성이다. ‘나’를 비움으로써, 언어를 초월하여 소통하는 하느님의 음성과 현존을 드러내는 영성, 나의 소리와 생각 대신 그분의 낮은 흐느낌, 그분의 순전한 침묵을 듣는 영성이다. 그분으로 인해 비로소 들리는 소외된 이들, 말을 잃은 이들의 소리를 듣는 영성이다. 그리하여 고통의 자리에 늘 계신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어지는 신비다.


▶이 글은 7월 11일 평신도 공동체 새길 교회의 초청으로 나눈 말씀 증거를 재구성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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