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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전사前史 14

 

함안지역 교우촌(1)

함안지역엔 일찍부터 피난 교우들이 모여 살았다. 경상도 북쪽에서 낙동강을 따라오다 주저앉았고 남강을 따라오던 교우들도 이곳에 머물렀다. 일부는 더 내려가 김해 쪽 교우촌에 흡수되기도 했다.


낙동강과 남강을 동시에 끼고 있는 대산면代山面 일대엔 피난 교우들이 유독 많이 모여 살았다. 당시 이 지역엔 저습지가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엔 좋은 땅이지만 홍수가 나면 물바다로 바뀌는 섭섭한 땅이었다. 피난 교우들은 이 일대에 모여 살며 상호 연락망도 갖추고 있었다.


지방 사람들은 방목지로 방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난 교우들은 움막을 치고 살았다. 어떻든 강은 먹을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대산면 저습지 인근엔 교우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흩어져 있던 그들은 누군가를 중심으로 뭉쳤다.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홍수를 겪으면서 차츰 안전한 쪽으로 옮겨갔고 대산지역에 정착을 시도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정착했을까? 1866년 병인박해 이전부터 있었다. 뒷받침하는 기록이 치명일기致命日記에 나온다. 순교자 구한선 다두(타대오)에 관한 기록이다. 치명일기는 1895년 발간된 책으로 병인박해 순교자 877분에 관한 기록이다.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4년에 걸쳐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치명일기에 등장하는 구 다두에 관한 원문原文은 다음과 같다.


함안미나리골즁인으로셔 리신부를뫼시고 거제도에 젼교ᄒᆞ엿더니병인년에진쥬포교의게잡혀매를만히 맛고나와셔즉시병드러칠일만희죽으니나흔이십삼쎄러라.(함안 미나리골 중인으로서 이 신부를 모시고 거제도에 전교하였더니 병인년에 진주 포교에게 잡혀 매를 많이 맞고 나와 즉시 병들어 7일 만에 죽으니 나이 23세더라.)


순교자 구 다두(타대오)는 함안지역 교우촌에 속한 인물이었다. 기록에 나오는 이 신부는 리델(Ridel 이복명) 신부를 가리킨다. 그의 복사服事로서 거제도까지 갔던 것이다. 당시 선교사의 복사가 되려면 건장한 체격과 함께 신분이 확실해야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함안 교우촌에는 구 다두(타대오)의 부모와 형제들이 살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리델 신부는 함안 교우촌에 머물며 미사 봉헌과 고해성사를 주며 활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자들의 추천으로 젊은 구 다두를 복사로 데리고 갔을 것이다. 기록이 없을 뿐이다.


구 다두를 배출한 함안 교우촌은 어떤 공소였을까? 1939년 거제 옥포 주임이었던 김후상(金厚相 1901~1983) 신부는 ‘거제도 천주교 연혁’이란 필사본筆寫本을 남겼다. 책에 의하면 순교자 윤봉문의 부친 윤사우尹仕佑는 함안 논실論實공소에 살다가 1883년 11월 선종한다. 함안의 논실공소는 거제도 교우들과 연대를 가질 만큼 안정된 교우촌이었던 것이다.


경상도 남부지역 공소에 대한 첫 번째 보고서는 로베르(Robert 김보록) 신부가 파리외방선교회에 제출한 1883년 교세통계표로 알려져 있다. 이곳엔 함안지역 공소 3개가 등장한다. 동천, 논실, 밤대공소다. 그러다 동천공소는 1885년 자취를 감추고 밤대공소 역시 1889년부터 통계표엔 나오지 않는다. 논실공소만 끝가지 등장한다.


논실의 위치는 함안군 가야읍 산서리山西里다. 원래 이곳은 함안군 대산면에 속해 있었는데 1873년 가야면에 편입되었다. 논실은 답곡畓谷 마을이라고도 한다. 산서리에서 북동쪽에 있는 고개를 넘으면 평림리(가등공소)를 만나고 남강이 흐르는 쪽으로 가면 구具 다두의 첫 무덤이 있었던 하기리下基里를 만난다. 구한선(다두)은 논실공소 교우였던 것이다.
 

 

마산교구 전사前史 15

 

함안지역 교우촌(2)

기록에 등장하는 함안지역 첫 공소는 동천, 밤대, 논실論實이라 했다. 로베르 신부의 1883년 보고서에 등장한다. 로베르 신부는 파리외방선교회 사제로 1876년 조선에 입국했다. 병인박해(1866년) 10년 뒤였다. 황해도에서 활동하다 1882년 경상도 전담 사제로 발령받는다.


경상도 전담은 그가 처음이다. 발령 후 그는 모든 공소를 방문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선교사들이 마음대로 다닐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과 프랑스는 1886년 한불조약을 체결하고 비준批准은 1887년 5월에 있었다. 따라서 공적인 박해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1883년 보고서는 1882년 6월부터 1883년 5월까지의 사목활동 내역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로베르 신부는 경남지역 많은 공소를 가능한 가보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의 방문은 최초로 이루어진 사목자의 공적인 방문이었다.


그가 찾아간 공소는 1882년 이전부터 교우들이 살았던 마을을 뜻한다. 지금의 공소와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공소 건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집을 모임 장소로 정하고 미사를 봉헌했다고 가정하면 된다. 따라서 1883년 보고서에 공소가 등장했다면 그 지역엔 훨씬 이전부터 교우들이 살고 있었다. 한편 선교사들 보고서엔 가끔 공소 이름이 바뀌고 있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일정한 장소에 공소 건물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임 장소가 바뀌면 보고서에도 이름이 바뀌었던 것이다.


1883년 교세 통계표에 나오는 마산교구 소속 공소는 8개. 함안咸安 동천, 논실, 밤대, 삼가三嘉 황개, 단성丹城 능구지, 진주의 소촌召村, 창원의 잉애터, 김해金海 노루목이다. 물론 이 공소들 외에도 로베르 신부가 사정이 생겨 못 간 공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논실論實공소 위치는 가야읍 산서리山西里라 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원래 대산면代山面에 속했다고 했다. 1860년대 대산면은 꽤 넓었다. 지금의 법수면法守面 일부와 산인면과 가야읍 북부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천과 밤대 위치는 알 수가 없다.


다음 표는 선교사의 함안지역 보고서를 연도별로 나열해 본 것이다. 공소 이름이 바뀌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칸 안의 숫자는 당시 공소 교우 숫자. 동천과 밤대공소는 1885년과 1889년부터 사라진다. 그런데 빈자리를 읍, 토뫼, 율량공소가 채운다. 율량공소는 1891년 나타나 끝까지 등장하고 있다.


말산末山, 가등佳嶝, 동박洞白공소 방문은 늦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동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밤대공소는 읍, 토뫼, 율량공소와 연관이 있다. 율량의 율栗은 밤나무를 뜻하기에 더욱 그렇다. 선교사는 당시 함안 군수가 살던 곳을 읍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이곳 교우들은 사정이 생겨 공소로 사용했던 집을 몇 차례 옮겼을 것이다.

 

230521 교구전사 15번 원고 표(홈피용).jpg

조선대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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