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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부활 대축일 담화문 -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posted Jun 1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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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부활 대축일 담화문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태 28, 7.10)


사랑하는 교우, 수도자 그리고 성직자 여러분!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감지하는 이 계절에 교회는 주님의 부활 대축일을 기념하고 경축합니다.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의 축복이 교구민 모두에게 가득히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지난 사순시기 동안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의 세력과 싸우신 예수님과 함께 참회와 속죄로 부활 축제를 준비해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로 우리 역시 죽음을 뛰어넘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키웁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터전이자 동시에 기쁜 소식의 핵심이고 희망의 근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와 삶의 방식을 결정합니다. 부활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갈망을 이루어 주는 축일입니다. 동시에 죽어야만 산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가르쳐주는 축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의 삶을 통해 죽어서 영원히 사는 삶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살아서 죽는 삶을 선택합니다. 부활의 축일을 기념하면서 우리는 죽어야만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되새기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에 충실할 것을 다짐합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죽음을 뚫고 나타난 생명, 죽음보다 더 강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비록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마련해 주신 의로움(義)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음을 고백합니다.
부활하신 분께서는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28, 7.10 참조). 왜 예루살렘이 아니고 갈릴래아인가? 갈릴래아란 어떤 곳이며, 오늘날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갈릴래아는 어디인가?

예루살렘은 진리와 거짓, 사랑과 증오 등이 대결하는 장소입니다. 그곳은 예수님을 적대하던 세력들이 모의하여 예수님을 살해한 곳입니다. 무죄한 사람을 처형할 정도로 정의감과 균형 감각을 상실한 장소이고, 천심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수심의 장소입니다. 군중의 우매함을 드러내 보인 장소입니다. 한 마디로 예루살렘은 암투와 투쟁, 폭력과 음모가 난무하는 장소일 수는 있었으나 결코 통합과 화해, 상생과 일치를 도모하는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갈릴래아는 제자들과 예수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장소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곳이 바로 갈릴래아이고, 스승 예수와 인격적 관계를 맺은 시발점이요, 사랑과 순종 그리고 꿈을 키운 곳으로 기억되는 장소입니다. 갈릴래아는 대립, 분열, 또는 대결 이전의 장소이고, 마음의 고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처음으로 만났던 그 장소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단순히 지나간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과거를 연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첫 마음으로 돌아가 새로운 출발을 위한 목적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했을 것입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보고, 꿈을 키우고, 희망을 가꾸기 위해 예전에 함께 삶과 우정을 나누었던 곳,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했을 것입니다. 삶을 새롭게 해석하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키우기 위해 비록 예전의 장소 갈릴래아를 선택했으나, 갈릴래아는 더 이상 예전의 갈릴래아일 수는 없습니다.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복음서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복수를 도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갈릴래아를 기점으로 유대와 헬레니즘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수행했으며, 갈라진 관계를 다시금 묶으려는 통합과 화해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복수 대신 통합과 화해를 모색했다는 사실은 초대 그리스도교의 아름다운 정신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바로 예수님의 정신이기도 했습니다. 이 정신은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정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한 권력자들에게 항거하지 아니하고, 복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죽음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오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관계와 환경은 심각한 대립의 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반목과 대결, 극도의 분열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립과 분열은 단지 사회적인 현상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신앙공동체 안에도 스며들어 있습니다. 틈만 나면 사랑과 자비를 입에 담는 우리 신앙공동체도 세상을 향해 보여주어야 할 본보기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와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와 동일하게 처신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너와 나는 대립합니다. 이러한 대립과 분열은 결국 우리 모두를 공멸의 길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인간의 본연의 모습은 서로 함께 공생하고 공존하는 것입니다. 상생하는 것입니다.
<나>가 나이기 위해서는 나 이외에 또 다른 <너>가 있어야 합니다. <나>가 나 일수 있는 까닭도 바로 <너>로 말미암아서입니다. 너는 나로부터 태어난 또 다른 나입니다, 너는 나와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입니다. 동반자는 빵을 나누어 먹습니다. 생명을 나눕니다. 너는 나를 비추어 주는 거울이고, 나의 메아리입니다. 너는 나의 목숨을 내어 놓아 사랑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너를 향한 저주와 질시, 너에 대한 반목과 불화는 결국 나에 대한 저주이고 증오입니다. 나와 다른 너를 살리는 것이 바로 나를 살리는 비결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새롭게 시작하자는 것은 바로 대립과 분열을 극복해서 통합과 화해 그리고 상생과 일치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예수님을 만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갈릴래아는 어디인가 궁금합니다. 오늘의 갈릴래아는 더 이상 지리적인 의미의 팔레스티나의 갈릴래아는 아닐 것입니다. 그 곳은 너와 내가 처음 만난 곳일 수도 있습니다.
사이가 악화되어 힘겹게 살아가는 부부의 경우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고백하던 곳일 수도 있습니다. 우정이 깨어진 친구들의 경우 그들이 처음 만나 마음을 묶어 영원히 변치 않을 우정을 맹약했던 곳일 수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던 곳을 갈릴래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 영을 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했고, 그 영 앞에 함께 복종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나와 너 사이의 대립과 분열을 극복하고 통합과 일치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는 분열되어 갈라진 우리를 하나로 모으시어 일치시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구원하시고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성령을 체험한 곳이 바로 오늘의 갈릴래아일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안>을 갈릴래아로 이해합니다. 새로운 갈릴래아, 즉 <그리스도 안>에는 헬라인이나 히브리인, 남자나 여자, 상전이나 종의 차이는 사라지고, 신분이 가져다주는 간격이나 차별은 무너지고 혈연이나 지연 또는 학연마저도 무너지고 통합됩니다. 나와 너의 차별도 없고 대립의 각을 세우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교가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할 복음은 새로운 만남의 장소인 갈릴래아를 알려주는 일입니다. 이 새로운 갈릴래아는 피안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 지금 그리고 여기일 것입니다. 온갖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여 통합과 일치를 이루는 곳이 오늘의 갈릴래아 일 것입니다. 분열과 대립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셨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생명을 이루는 통합과 일치의 길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의 초대를 향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구민 모두가 죽음을 넘어 생명의 부활로 건너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신앙 고백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끼시기를 기원합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우리들의 믿음의 여정에 동행하시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 머무시기를 기원합니다.



2005년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교구장 안 명 옥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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