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칼럼
2020.11.25 11:07

광화문 광장과 우리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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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민아 마리아 교수/ 조지타운대학교

지난 8월 15일 광화문 광장에서 전광훈 목사가 주도한 대규모 반정부 집회 때문에 일어난 파동과 코로나19의 재확산 기사를 읽으며 떠올랐던 감정은 걱정과 우려만은 아니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미미하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던 것, 참으로 부끄럽게도 그것은 안도감이었다. 나와 가까운 이들이 속한 세상의 경계가 그들과 멀다는 것에 나는 안심이 되었다. 내 부모님이 그날 광장에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는 다행스러웠다. 전광훈 목사가 내가 속한 교회의 일원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내가 아는 이들이 광장에 모여 막말로 점철된 구호에 아멘을 외칠 가능성이 적다는 것, 내가 속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점잖아서 언론에 노출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또 무엇, 무엇, 나는 그들과 나를, 그들과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수많은 요소들을 찾아내며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을 향해 야무지게 손가락질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들을 내 삶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며 누구나 비난해도 마땅할 대상으로 만들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그들과 맞닿을 만한 삶의 결들이 모두 제거된 채 때 묻지 않은 종이처럼 파리하고 얄팍하게 남아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그들에 비해 떳떳한가. 단지 광화문 광장과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코로나19가 드러내고 있는 사회적 고통에 책임이 없다고 나는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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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판된 민중신학자 김진호 선생의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는 광화문 광장 집회의 큰 축이 된, 개신교 우파라는 난처한 정치세력이 한국 사회에 형성된 배경을 분석한다. 1990년대 경제 위기를 전후하여 한국의 개신교회는 서울 강남의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교양과 경제력을 갖춘 귀족적이고 세련된 고학력 중산층 신자가 주도하는 종교로 바뀌었다. 자신의 취향과 필요에 맞는 교회를 쇼핑하듯 찾아다니는 그들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던 개신교회는, ‘웰빙보수주의’라고 책에서 이름하고 있는 그들의 ‘품위 있는’ 문화적 영성적 요구에 맞춰 예배의 형식과 교회 운영, 교육의 내용을 대폭 수정한다. 이 흐름을 따르는 기성 교회가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무시하는 이들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가난한 이들이다. 김진호 선생은 교회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돌이가 된 그들이 사회의 변방에서 만나게 된 대표적인 두 그룹이 신천지와 극우주의라고 말한다. 신천지는 소외된 그들을 위로하고 칭찬하는 방식으로, 개신교 우파는 상처받은 그들의 분노를 쏟아낼 대상과 공간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그들을 흡수하며 세력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차, 이차 코로나19 확산의 진원지로 지목되어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린 두 그룹은, 이제 와 애써 부정하고 싶어도 도리 없는, 한국 개신교회의 거울에 비춰지지 않는 뒷모습이다. 가난하고 실패한 이들, 경쟁에서 밀려나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을 자신들의 경계 밖으로 쫓아내며 성장과 발전을 구가해 온 지난 20년 세월의 역풍을 지금 호되게 맞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산층, 품위 있고 세련되고 교양을 갖춘, 귀족적인” 등으로 표현되는 웰빙보수주의 신자들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바깥세상에 대한 성찰이 없이, 비슷한 생활수준을 가진 이들끼리 교양과 품위를 유지하며, 기존 사회 질서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 고만고만한 윤리적 삶에 자족하며, 가난이라는 실재하는 고통을 추상적이고 영적인 문제로 환원하여 기도문을 통해서 나 기억하고 입에 올리는 이들의 영성은 사실 우리 본당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영성이 아닌가?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실패한 이들, 교육수준과 소득이 낮다는 이유로 도태된 이들을 품어줄 자리를 우리는 만들었던가? 어쩌면 꽤 오래전부터 천주교회는 소위 웰빙보수주의를 추구해 오지 않았을까? 개신교회에서 밀려나 신천지를 만나 새 삶을 찾았다고 하는 이들이나, 광화문에서 구국의 열정을 불태우며 예수 한국을 외치는 이들 가운데 천주교회의 고고한 문턱에 애초에 발을 들여놓을 엄두를 내어 본 이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가난과 고통이 관념과 도덕으로 승화하면, 역설적이게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실재하는 가난과 고통은 언제나 사람의 몸을 입는다. 거친 숨을 내쉬며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으며 울고 성내고 신음하는 고통스런 사람의 그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예수가 가파르나움 근처의 언덕에서 산상설교를 했을 때, 그의 주변에는 제자들과 같은 정예부대뿐 아니라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무리’가 있었다. 산상설교 구절이 나오기 전 마태오는 그 무리가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졌는지 묘사한다. “그들은 갖가지 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과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이었다(마태 4,24). 예수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무리들은 성화에나 등장하듯 다소곳이 앉아 눈을 빛내며 온유한 마음으로 그이의 설교를 새겨듣던 웰빙 신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태만상의 고통을 드러내며, 찌든 가난의 냄새를 풍기며, 밥을 내놓으라고, 내 병을 고쳐달라고, 외로워 죽겠다고, 세상을 뒤집어 버리겠노라고 아우성치던 군중이다. 분노의 정도로 치자면, 또 ‘개념’과 ‘질서’가 없는 정도로 치자면 아마도 광화문 광장의 군중과 닮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측은한 마음’으로 그들을 돌보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다. 예수는 그 악다구니 속에서 상처 입고 서러운 ‘사람’들을 보았고, 그이들이 안쓰러워 자신의 마음을 내어 주었다. 예수의 그 마음은, 광화문 광장 소식을 들었을 때 내 가족과 지인이 없다는 이유로 안도감이 들었던 내 마음과는 멀어도 한참 먼 것일 게다. 그들에게 마침내 버림받고 죽어가면서도 “이리 와 내 살을 먹어라” 했던 예수의 마음은, 가능하면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교양 있고 말 잘 통하는 신자들이 우리 본당에 많았으면 은근히 바라는 내 마음과는 완전히 다른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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