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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론 윤행도 가롤로 신부

소리, 그리고 말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제가 근무했던 해성고등학교만 해도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 전화벨 울리는 소리,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차임벨 소리,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거나 클릭하는 소리,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들려오는 아이들의 밝고 큰 웃음소리, 선생님이나 아이들이 와서 각종 서류발급을 요청하는 소리 등등. 그렇게 많은 소리들 가운데서도 별 탈 없이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저의 귀가 익숙해진 탓도 있고 제가 필요로 하는 소리에만 신경을 집중하는 탓도 있겠지요. 또한 저 역시도 다른 사람 못지않게 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제가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행정실에서 같이 근무했던 직원들에게 내리는 업무지시 소리, 특강이나 수도원 소식지 등 부탁받은 글을 통해 지껄였던 소리(글), 지난 사순 시기 동안, 그리고 그동안 사제 직무를 수행하며 미사 때 했던 강론이나 여러 본당에서 했던 특강 때 내뱉은 소리 등등.


소리의 바다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은 수많은 소리들이 발생했다가는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유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한 귀로 들어와서 다른 한 귀로 나가버리지요.


그러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귀에 들려온 말씀은 마음속에 오래 머물고 나아가 삶의 모습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씀이 아니라 소리입니다. 


요즘 제 안에서 머물고 있는 말씀은 “쓸모없는 종”(루카 17,10)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시어 당신의 전 생애를 바쳐 인간을 섬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제는 섬기는 자, 다시 말해 종입니다. 그것도 쓸모없는 종입니다. 이 말씀이 제게 머물고 있는 이유는 종인 주제에 그동안 주제 파악도 못하고 주인처럼 행세해 왔던 지난날의 제 모습 때문입니다.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올해로 19년째인데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냐고 책망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말씀이지만 그동안은 일반 신자님들이 주인 대접을 해주는 것에 맛 들여 애써 외면하고 아닌 채 해왔었습니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제 주제를 알고 그렇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저는 아무 여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처럼 말씀이 오실 길을 닦는 ‘소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소리만 요란한 쓸모없는 종,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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