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본문시작

복자 구한선(具漢善) 타대오

 

 
 bu_dot3.gif 간략설명 모진 매질에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젊은 순교자
 bu_dot3.gif 주      소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733-1(가등마을) 
 bu_dot3.gif 전화번호 (055)582-8041
 bu_dot3.gif 팩스번호 (055)582-8041
 bu_dot3.gif 홈페이지 http://cafe.daum.net/daesanseungji
 bu_dot3.gif 전자메일 m3ds@cathms.or.kr
 bu_dot3.gif 관련기관 대산 성당    
 bu_dot3.gif 관련주소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구혜리 246-3
1.png

 

 

 

 

 

2.jpg

구 타대오는 함안군 대산면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언제 영세 입교했는지 알 수 없지만 피난 교우의 후손임이 분명하다. 타대오는 체격이 건장하고 신앙심이 깊은 분이었을 것이다. 당시 박해시대에 선교사의 복사로 일한다는 것은 체력과 신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 선교사의 복사는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다. 선교사의 짐을 지고 다녀야했고, 낯선 사람들로부터 보호해야했고, 지리에 밝아야했고, 돈을 가지고 다니면서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사는 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하려니 힘도 세고 신앙심도 투철하고 가정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그런 사람이어야 했다.

타대오는 병인박해 전(前)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의 복사로 거제도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리델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로 1869년 조선교구 6대 교구장이 되신 분이다. 리델 신부는 경상도 사목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 남쪽의 교우촌을 방문하였던 것이다. 그때 구  타대오를 대동하고 다녔다.
당시 남쪽에는 많은 교우촌이 있었다. 함안의 대산지역, 사천, 문산, 하동, 곤양, 서포, 북천, 고성의 기월리, 황리 그리고 거제도 전역이었다. 이런 곳에 서양 신부를 모시고 다녔으니 구 타대오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병인박해가 본격화되자 리델 신부는 충청도로 떠나고 구 타대오는 진주에서 지내다 붙잡힌다. 그는 감옥에 갇혀 며칠 동안 혹독한 문초를 받았다. 그의 몸은 심한 매질과 고문으로 성한 곳이 없었다. 결국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자 포졸들은 집으로 돌려보냈다. 순교자는 본가로 돌아온 뒤 칠일 만에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당시 나이 23세였다. 그의 순교는 장하치명(杖下致命)으로 기록되어 있다. 매질과 고문의 결과로 죽게 되었다는 말이다.
순교자는 특별히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유는 선교사가 있는 곳을 대라는 고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교우촌을 돌아 다녔으니 그곳에 대한 정보를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순교자는 배교도, 배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매를 맞았겠는가. 결국 매를 맞아 순교한 것이다.

3.JPG

 

 

 

 

 

 

 

 

3-1.jpg

순교자의 무덤은 1959년 당시 함안본당 신부였던 제찬규 신부의 노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 신부는 치명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순교자의 무덤을 찾으려 애쓰다 대산 공소 회장이었던 윤성학(尹聖學) 바오로의 증언을 듣게 된다. 그는 구 타대오의 처조카인 최성순(崔聖淳)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최성순은 순교자의 아들이 부친의 무덤을 사토(莎土)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순교자의 무덤은 신(愼)씨들의 묘소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 증언을 바탕으로 여러 과정을 거쳐 순교자의 무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후 대산본당에서는 순교자의 무덤이 외교인의 묘역 안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현재 위치인 평림리 가등산으로 이장하였다(1976년 9월). 그러다가 2002년 5월부터 성역화 사업을 시작하였다. 영남 순교사에 의하면 구 타대오에겐 아들이 있었는데 전북 장수 광대골 공소 회장을 역임했고 그의 사위 역시 공소 회장을 했다고 한다.

 

 

증언록

5.JPG

 

치명일기 831. 구 타대오

함안(咸安) 미나리골 중인으로서 이 신부(李 神父)를 모시고 거제도에 전교 하였더니 병인년에 진주 포교에게 잡혀 매를 많이 맞고 나와서 즉시 병들어 7일 만에 죽으니 나이는 23세러라.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163번 

구 다데오는 본시 함안 대산면 미날금리 사람으로 갑자년 봄에 사군난(私窘難)을 만나 진주 포교에게 잡혀 본 진영에 갇히어 문목을 당하고 형장을 조금 받고 놓임을 얻어 본집으로 돌아와 수개월 후에 병들어 죽으니 지금 장수 가항 사는 김 회장 바오로가 다데오의 사촌에게 자세히 들었더라.


박순집 증언록. 3권 34면

구 다테오는 함안 미나리골 중인(中人)이라 어려서 총명하여 유서(儒書)와 잡서(雜書)를 많이 읽고 요술(妖術)로 신장(神將) 부리는 법을 하더니, 마침 교우(敎友)를 만나 성교(聖敎)를 듣고, 즉시 배워 안 주교에게 영세(領洗)하고 열심 수계하고 또 이 주교를 모시고 거제도에 가 전교하고, 봉교(奉敎)한지 십 삼년 만에, 병인년 군난에 진주 포교를 만나 잡혀 수감할 때, 포교가 손가락을 깨물고 형벌을 많이 하고 진주 진영에 이십 일을 갇힐 때, 언문(諺文)으로 좋은 말을 모아 글을 지어 영장의 실내(室內)에게 올렸더니, 그 실내 영장에게 말하여 놓을 때에 형장(刑杖) 이십 도를 치되, 아프다 말하지 아니하니, 영장이 헐장(歇杖)한다 호령(號令)하되, 사령(使令)이 가로되, "만일 더 치면 죽겠나이다." 영장이 가로되, "그러면 어찌 아프다는 말이 없느냐." 다데오가 가로되, "제 늙은 어미가 문밖에 있으매 아프다 소리를 하면 기절하겠기로 못하였나이다." 영장 왈, "그러면 어찌 천주학은 하였느냐." 답 왈 "부모를 효도하고 공경하라 하였기로 하였나이다." 즉시 방송하여, 나아가 이레 만에 병들어 이레를 앓고 선종(善終)하니, 죽은 후에 이마 위에 '품'자로 붉은 점이 밝혔더라. 나이 이십 삼세더라. 안의 최 회장 아오스딩이 기록하나이다.

 

하느님의 종 109번

구한선(具漢善) 타대오는 경상도 함안 미나리골(현 경남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구는 글을 많이 읽었는데, 천주교에 입교하기 전에는 어떤 요술에 빠진 적도 있었다.
어느 날 타대오는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는 즉시 이를 받아들여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성 다블뤼(St. A. Daveluy)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약 10년 동안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리델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거제도 전교에 동행한 적도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한 뒤, 타대오는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것 관아로 압송되었다. 이윽고 관장 앞으로 끌려나간 그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또 옥에 갖혀서는 주요 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관장의 부인에게 전하였다.
타대오의 글을 읽은 그 부인은 관장에게 그를 석방해 주도록 요청하였고, 이 말을 들은 관장은 화가 나서 구한선 타대오를 옥에서 끌어내도록 하여 혹독하게 매질을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대오는 '아프다'는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이에 관장이 화가 나서 "제대로 매질을 하지 못한다"고 형리들을 꾸짖자, 형리들은 "제대로 매질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더 때리면 죽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이 이번에는 타대오를 향해 "어찌하여 '아프다'는 소리 하나 내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늙으신 어머니가 문밖에 있을 터인데, 만일 신음 소리를 내면 어머니가 이를 듣고 기절하실 것이므로 신음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또 관장이 "그러면 어찌하여 천주교를 신봉하였느냐?"고 묻자, 타대오는 "부모에게 효도를 하라고 가르치므로 천주교를 신봉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처럼 모진 형벌을 당한 뒤에 타대오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 형벌로 인해 7일 만에 성종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2세 였다. 순교한 뒤 그의 이마에 '품'자 모양의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이 고향 인근에 안장하였다.   

 

[출처 : "죽어 영원을 사는 사람들" 천주교 마산교구 성지사적지 정비위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