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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박대식(朴大植) 빅토리노

 
 bu_dot3.gif 간략설명 죽어서도 선산에 못 묻히고 남의 문중 산에 평장으로 누워
 bu_dot3.gif 주      소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산 30(책골)
 bu_dot3.gif 전화번호 (055)345-3226
 bu_dot3.gif 팩스번호 (055)345-3227
 bu_dot3.gif 홈페이지  
 bu_dot3.gif 전자메일 c1jl@cathms.or.kr
 bu_dot3.gif 관련기관 진례 성당    
 bu_dot3.gif 관련주소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송정리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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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식(朴大植) 순교자는 1811년 김해시 진례면 시예리(詩禮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부유했으며 언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부친(박만혁)과 형제들은(대붕, 대홍, 대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병인박해를 만나게 된다.
병인박해 때는 가족 모두가 피신하여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1868년 무진박해 때 박대식은 조카인 박수연(朴守連)과 함께 붙잡힌다. 그들은 김해 관아에서 삼 일간 문초를 받은 뒤 대구의 경상감영(監營)으로 이송되었다.

     
박대식은 이곳 대구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연일 배교를 강요당하며 고문을 받았다.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다. 가족들이 면회 왔을 때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 웃옷으로 몸을 가렸다고 한다.
박대식은 1868년 8월 27일(음) 조카 박수연과 함께 참수 치명한다(양력은 10월 12일). 당시 박수연은 예비신자 신분이었다. 박대식의 가족들은 포졸들에게 돈을 주어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오게 하였다. 가족들은 시신을 확인하고는 염습(殮襲)한 뒤 선산에 모시려 하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의 외인들이 반대하였다. 하는 수 없어 그의 아들 삼 형제(종립, 종반, 종철)와 형제들이 마을 뒷산인 챗골(茶谷) 유씨들의 문중 산에 평장(平葬)으로 매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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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20년이 지난 1956년 봄에 후손들이 무덤의 봉분을 크게 하고 순교자 부인의 묘(墓)도 이장하여 완전한 묘역으로 가꾸었다. 그리고 1966년 4월 15일에는 당시 진영 본당 주임이었던 유창호(劉昌鎬 토마스) 신부의 주선으로 비석을 세워 그의 순교를 기리게 하였다. 유창호 신부는 전해지지 않는 그의 세례명을 임시로 ‘로렌죠’ 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박대식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마백락(馬白樂 클레멘스) 선생과 순교자의 4대 손인 박영식(요아킴)의 노력으로 순교자의 세례명이 빅토리노임을 밝혀냈다(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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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병인순교자 증언록. 159

박 빅토리노, 증언자 미상. 목격자 박 조예
정리번호 159(문서번호 91B)의 문서는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내용이 병인치명사적 23권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병인치명사적 23권의 수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순교자들의 표만을 게재하였다.

 

병인치명사적 23권

박 위도서, 박수영, 송 마태오, 박요셉 네 사람이 본래 김해 사람으로 무진(1868년) 칠월(7월) 초칠일(7일)에 대구 김해 양 포교에게 잡혀 김해 관아에 가서 한 삼일(3일) 갇혔다가 대구로 잡혀 올라가 동년 팔월(8월) 십칠일(17일)에 한가지로 참수 치명 하니라.

 

병인치명사적 18권

박 위도서, 박 서방 수영, 송 마태오, 박요셉
본디 김해 례동 살더니 무진(1868년) 칠월(7월) 초칠일(7일)에 대구 포졸이 본 읍 포졸과 더불어 잡아 본 읍으로 들어가 있다가 삼일(3일)만에 대구로 올라가서 팔월(8월) 이십칠일(27일)에 참수 치명하니, 나이는 오십 칠세(57세)요. 때는 무진 팔월 초칠일이더라.
증참(證參) 박 안당은 죽고. 그 아우 도마가 그 형에게 들었습니다. 도마가 살기는 김해 중부면 안평동. 子 文七. 박선달.

 

하느님의 종 123번

박대식(朴大植) 빅토리노는 경상도 김해 예동(현 경남 김해시 진례면 시예리) 사람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후로는 언제나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8년의 박해 때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과 김해 포졸들이 함께 그의 집으로 몰려와 빅토리노와 그의 조카 박수연을 체포하여 김해 관아로 압송하였다. 당시 그의 조카는 아직 예비신자였다.
김해 관아의 옥에서 빅토리노는 송 마태오와 박 요셉을 동료로 맞이하였다. 이후 그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한 뒤 3일 만에 대구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대구 감사는 결국 빅토리노와 그의 동료들을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빅토리노는 조카와 동료 2명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로, 당시 빅토리노의 나이는 56세였다.
참수형을 집행한 뒤 감사는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준다는 명목 아래 그들의 머리를 높이 매달도록 하였다. 한편 빅토리노의 가족들은 그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구로 와서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출처 : "죽어 영원을 사는 사람들" 천주교 마산교구 성지사적지 정비위원회 ]

 

지도보기

찾아가는 길

<승용차>
부산에서 남해 고속도로를 타고 진례 IC에서 나와서 진례면사무소 방향으로 좌회전합니다. 고속도로 밑을 지나자마자 금호가든 쪽으로 우회전(오척, 다곡 방향)해서 약 1km 정도 올라가면 한쪽이 폐쇄된 진영 터널이 나옵니다. 그곳에 차를 세우고 표지판을 따라 좌측 산길로 약 10분 정도 오르면 순교자 묘에 이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