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마산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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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신석복(申錫福) 마르코

 
 bu_dot3.gif 간략설명 신앙의 후배들과 함께 누워
 bu_dot3.gif 주      소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245(진영 성당 공원묘지)
 bu_dot3.gif 전화번호 (055)343-2018
 bu_dot3.gif 팩스번호 (055)345-2357
 bu_dot3.gif 홈페이지 http://cafe.daum.net/myungrye
 bu_dot3.gif 전자메일 c1jl@cathms.or.kr
 bu_dot3.gif 관련기관 진례 성당    
 bu_dot3.gif 관련주소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진영리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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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마르코는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明禮里)에서 살았다. 그는 누룩과 소금 행상(行商)을 한 것으로 알려 지고 있는데 원래는 농사를 지었고 장사는 부업이었다.
명례 지방은 일찍이 피난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다. 마르코와 그의 가족들은 이들의 권면으로 신자가 된 듯하다. 그의 형제들은 마르코가 순교할 때는 신자가 아니었고 훗날 모두 입교하였다.
순교자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힌다. 창원 쪽으로 장사 갔다가 돌아오던 길이었다. 함께 갔던 오(吳) 야고보도 체포된다. ‘병인 치명 사적’에 따르면 포졸들은 마르코가 신자인 것을 알고 동네로 잡으러 왔었다. 그러나 장사 나가고 없었기에 포졸들은 며칠을 기다린 뒤 돌아오는 마르코를 길에서 체포한 것이다. 그들은 순교자를 밀양으로 압송한 뒤 하루를 지냈다. 그 동안 형제들이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빼내려 했지만 순교자는 완강히 거절했다.

 

 
마르코는 대구로 압송되었고 혹독한 심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수차례의 문초와 형벌로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졌다. 그렇지만 마르코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저를 놓아주신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 말에 관장은 화를 냈다. 순교자는 9일간 더 감옥에 있다가 1866년 2월 15일(음) 교수형(絞首刑)을 받아 순교하였다(양력 1866년 3월 31일). 그의 나이는 39세 때였다. 이후 마르코의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마르코는 김해 사람 김 베드로와 또 한 사람의 김 씨와 함께 순교하였고 김 씨 부인이 순교 장면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편 치명 일기에는 순교자의 이름이 이냐시오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이냐시오는 마르코의 아들인데 치명일기를 편집하던 과정에서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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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JPG 마르코의 유해는 그의 아들 이냐시오가 돈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모셔왔다. 그러나 명례에는 지방 유지들의 반대로 모시지 못하였고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翰林亭) 뒷산의 노루목(김해군 한림면 장방리)에 안장하였다. 그 후 진영본당에서는 순교자의 묘소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본당 공원묘지로 이전하였다(1975년 12월 1일).
순교자의 증손자인 신현기(바오로)의 증언과 일제 강점기의 호적초본을 통해 신 마르코의 속명이 신석복(申錫福) 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순교자의 후손 중에는 신순균(申順均 바오로) 신부가 있다. 신 신부는 고성 황리 본당 초대주임으로 마산교구와 인연을 맺었었다. 그러나 1948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했고 대구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증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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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일기 795. 신 이냐시오

본디 밀양(密陽)사람이라. 대구 포교에게 잡혀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9세요. 때는 대개 병인 2월 15일이러라.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2번

김 베드로는 본래 경상도 김해 딘실 살더니, 병인년 군난에 쫓겨 대구 희남물로 가서 잡혀 대구 읍내로 와서 죽을 때에 다른 교우 두 사람과 함께 죽였노라 하고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신 마르코요, 한 사람은 김가요, 그때 본이는 김가의 아내라.

 

병인 치명 사적. 3권

신(申) 이냐시오는 경상도 밀양 사람이라 봉교한지 십여 년 후에 병인년 이월 초일에 대구 포교에게 잡혀 진영(鎭營)서 추열(推閱)할 때 매를 많이 맞아 상하고 감옥에 갇혔더니 외교인 일가가 영문을 정하여 대사(사면하는 글)를 진영에 올리매, 영장(營長)이 다시 올려 묻기를 “네가 천주학을 하느냐” “합니다” “너를 놓아주어도 하겠느냐” “나가도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놓아주지 아니하고 십 여일 만에 교살(絞殺)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9세였다.


병인 치명 사적. 18권

795에 있는 신 이냐시오는 이냐시오가 아니오라 말구오니 본명을 바꾸소서. ‘오 야고보’ 본디 밀양 명례 살더니 병인년 정월에 창원 마포에 장사 간 후에 대구 령포 우두머리가 내려와 가산을 탈취하고 여러 날을 수소문 하여 장사 갔다가 온다는 말을 듣고 포졸등이 마주가다가 김해 가산 지경에 이르러 행인 4~5인을 만나 성명을 차차 물으니 “내가 신가라” 하거늘 즉시 수감하야 밀양으로 와서 하룻밤 사이에 무수한 형벌을 가하고 떠나가니, 형제와 주민과 포졸과 의논하여 전(錢) 80냥을 가지고 또 나와 은근한 곳에 안치하고 말구에게 통기하거늘, 말구는 그 형 다려(에게) 말하되, “일 푼전이라도 주지 마라” 하고, 포졸을 재촉하여 가거늘, 그 형들은 돈을 가지고 회로(돌아)오고 말구는 포졸과 한가지로 가매, 지근(눈, 귀, 코, 혀 등의 몸의 오근) 지껄 능욕을 받고, 대구 진영으로 가서 3번 형벌에 전신이 성한 곳이 없어 육혈에 옷이 다 젖고, 뼈가 부러지되, 종시 배교하지 아니하니, 다시 옥에 놓였다가 9일 후에 교(絞)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9세요 때는 병인년 2월 2일. 오(吳) 야고보는 말구와 한 가지로 잡혀 대구서 동시 치명하니라. 자식, 니고나오 지금 명례에 산다.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증참(證參) 외인 형 죽었다. 동내 주민 한사람 최명언.

 

하느님의 종 123위. 106번

경상도 밀양의 명례(현 경남 밀양읍 명례리) 사람인 신석복(申錫福) 마르코는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던 신자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창원 마포로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오 야고보 등과 함께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는 마르코가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 생활을 한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이에 앞서 대구 포졸들은 마르코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명례로 들이닥쳐 그의 집을 찾아낸 뒤 재산을 탈취하였다. 또 여러 날 수소문한 끝에 그가 장사를 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마르코가 돌아올 만한 길로 달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김해 가산이라는 곳에서 마르코를 만나 천주교 신자임을 확인한 뒤, 즉시 체포하여 밀양으로 압송하였다.
포졸들은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르는 동안 마르코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하였다. 그런 다음 그를 대구로 끌고 갔는데,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마르코의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가지고 대구로 가는 일행을 뒤좇아 갔다. 그들 일행을 만난 마르코의 형제들은 포졸들과 수작한 뒤, 마르코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는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로 인해 신석복 마르코는 대구로 가는 동안 자주 능욕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대구에 도착해서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도 부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이 말을 듣자 화가 나서 다시 마르코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며칠을 옥에 가두었다가 교수형을 집행하였으니, 이 때가 1866년 3월 31일(음력 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이후 마르코의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하였다.
[출처 : "죽어 영원을 사는 사람들" 천주교 마산교구 성지사적지 정비위원회 ]

 

찾아가는 길

<승용차>
남해 고속도로 진영 IC에서 나와 14번 국도를 따라 진영읍내로 들어가 진영역을 지나 1.5km 쯤 가면 진영 성당 공원묘지 표지판을 볼 수 있습니다.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 묘는 공원묘지 야외제대 바로 옆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