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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오

 
 bu_dot3.gif 간략설명 목이 없어 무두묘인가?
 bu_dot3.gif 주      소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 987 사봉 공소
 bu_dot3.gif 전화번호 (055)761-5453
 bu_dot3.gif 팩스번호 (055)761-5456
 bu_dot3.gif 홈페이지 http://mun.cathms.kr
 bu_dot3.gif 전자메일 ms1009@cathms.or.kr
 bu_dot3.gif 관련기관 문산 성당   
 bu_dot3.gif 관련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소문리 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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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정 안토니오는 진주시 사봉면 출신으로 부친 정서곤(鄭瑞坤)과 모친 울산 김씨 사이의 외아들이었다. 훗날 그는 칠원 윤씨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는데 신자였던 아내의 권면으로 입교 영세하였다. 순교자는 21세 때 아들(中舜)을 얻었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며 살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는 포졸에게 잡혀 진주 감옥에 갇힌다(음력 9월 20일). 여러 번 심한 문초와 고문을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들은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내 윤씨는 매일 주먹밥을 들여 보내며 남편을 격려하였다.

     
결국 이듬 해인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 순교자는 매를 많이 맞은 끝에 감옥에서 숨진다.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죽은 뒤 그의 일가들이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왔는데 머리를 가져오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하체(下體)만 장사 지냈다고 한다.
어찌하여 머리를 가져오지 못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순교자의 무덤에는 머리가 없다는 사실이 신자들의 입을 통해 전래되었다. 무두묘(無頭墓)란 말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그 후 1946년에 문산 성당으로 부임한 서정도(벨라도) 신부는 순교자와 무두묘 이야기를 듣고 무덤을 찾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3월 29일 신자들과 정씨 문중 사람들의 노력으로 무덤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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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JPG 결정적인 제보를 한 사람은 당시 사봉면 무촌리에 살고 있던 할머니였다. 광산 김씨 텃골 댁으로 알려진 할머니는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순교자의 무덤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무덤은 허유고개 비탈에 있었는데 봉분(封墳)이 납작하여 얼핏 보면 무덤인줄 모를 것 같았다. 교우들이 무덤을 열었을 때 구덩이를 조금 파서 묻은 것이 완연했다.
서정도 신부는 그해 5월 31일 교우들과 순교자의 외인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덤을 다시 열고 유해를 새로이 입관하였다. 그리고 무덤이 밭 뚝 길옆에 있었기에 약간 위쪽으로 이장하였고 본당에서 준비한 비석을 세웠다.

 

순교자 정찬문의 머리를 가져오지 못한 것에 대한 견해
(신은근 신부)

 

정찬문이 잡혔을 때 고복했다는 기록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있다. 고복(考覆)은 - 죽을죄에 해당하는 죄인(罪人)의 옥안(獄案)을 재심한다는 말이다. 정씨 문중(門中)에서 고복했을 것이다. 정찬문은 천주교인이 아니니 다시 심판해 달라는 고복이었을 것이다. 그 사이 문중에선 정찬문을 회유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순교자는 완강히 거부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진주 감영(監營)에선 골치 아팠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죽은 뒤에도 시신을 다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남겨 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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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록

치명일기 830번.

진주(晋州) 동면 허유고개 중촌 사는 양반이라. 병인 가을에 진주 포교에게 잡혀 혹독한 형벌 아래서 죽으니, 나이는 40여 세러라.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163번

정 안토니오는 본시 진주 동면 허유고개 사람으로 병인년 가을에 진주 포교에게 잡혀 고복(考覆)하고 진주로 가 옥중에 여러 달 갇혔다가 영정(營庭)에서 형장(刑杖)을 받아 치명하니, 지금 장수 가항 사는 김 회장 바오로가 그때 진주 소촌 사는 구 다테오에게 자세히 들었더라.

 

박순집 증언록 3권 31면

정(鄭) 안토니오는 진주 동면 허유고개 중촌 사는 양반(兩班)이라, 계해(癸亥.1863)년에 입교하여 사년 동안에 열심 수계 하더니 병인년 가을에 진주 포교에게 잡히니, 본골 좌수(座首)와 여러 일가(一家)들이 이르되, “배교하는 한 말만 하면 잡혀 보내지 아니 하겠다” 하나, 잠잠히 대답하지 아니하고 잡혀 가매, 많은 가산은 적몰(籍沒)하고, 옥에 들어가 이십 오일 동안에 형벌을 무수히 받고, 그 아내가 밥을 빌어다가 먹이더니, 하루는 매를 많이 맞고 그 밤에 죽으니, 시체가 옥중(獄中)에 삼일을 있는지라, 그 외인 조카와 하졸(下卒)이 염(殮)하니, 몸이 굳지 아니하고 얼굴이 화려하여 산 모양 같은지라, 나이 사십여 세더라. 안의 최 회장이 기록하옵나이다.

 

하느님의 종 110번
경상도 진주 허유고개 중촌(현 경남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의 양반 집안에서 1822년에 태어난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오는 먼저 영세 입교한 아내로부터 뒤늦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교리를 배워 입교 하였으니, 그때가 나이 41세 때인 1863년이었다.
이후 안토니오는 3년 이상을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 사방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고, 그도 그 해 가을에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일가 친척과 평소에 알고 지내던 그 지방의 하급 관리가 와서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끌려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유혹하지만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주로 끌려간 정찬문 안토니오는 25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종종 관장 앞으로 끌려나가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들은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상활 속에서도 그의 아내는 밥을 빌어다 옥으로 가져가 그에게 넣어 주곤 하였다.
어느 날 안토니오는 다시 옥에서 끌려나와 무수히 매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 다음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간 뒤 그날 밤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이때가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안토니오가 순교한 뒤 그 시신은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었다. 이후 그의 조카들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고향 인근에 장사를 지낼 수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몸이 굳지 않았고, 얼굴에 화색이 있어 산 사람 같았다고 한다.

[출처 : "죽어 영원을 사는 사람들" 천주교 마산교구 성지사적지 정비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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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보기

찾아가는 길

<승용차>
남해 고속도로 진성 IC에서 나와 마산 방면으로 2번 국도를 따라 사봉면으로 갑니다. 반성천을 가로지르는 무촌교를 지나 우측의 새길 주유소를 지나면서 바로 우회전하면 순교자 묘에 도착합니다.

<대중교통>
* 마산 남부시외버스 터미널(사봉행 차량 승차) -> 사봉 삼거리 하차 -> 안내 표지판
* 진주 산업대학교, 남중학교 건너편 정류장(반성행 시내버스 17-5, 51, 55번 승차) -> 사봉 삼거리 하차 -> 안내 표지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