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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응권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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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서응권 (男)

세례명 요 한
출생지 김해시 한림면 장방리
생년월일 1827년
신분 평신도
순교지 김해관아
순교일 1868년
나이 41세
순교 교살
관련문헌 승정원일기(고종 5년 윤4월 23 일), 한국 천주교 교회사 하 권(류홍열) p.175,
영남 순교 사(김구정) p.335,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마맥락) p.736

 

서응권 요한은 경상도 김해 노루목(現 경남 김해시 한림면 장방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분이었다. 어떤 경로로 그가 천주교에 입교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세례 받은 후 농사일을 하며 부인 윤씨와 여섯 자녀와 함께 열심히 살았다.
 1868년 5월 부산에서는 이른바 박근기(朴根基) 사건이 발생했다. 서응권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순교하였다. 당시 천주교인에 대한 정부의 감시가 삼엄해지자 진보 성향의 몇몇 교우들이 일본인 교우를 통해 서양인(西洋人)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이들은 서양인을 만나 조선에도 종교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도록 조정에 힘을 써 달라는 편지를 전하려했다. 그러나 편지를 지니고 있던 박근기가 현장에서 붙잡힘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박근기는 심문을 받았고 동참했던 사람들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졌다. 서응권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거주지인 김해 노루목에 피신해 숨어있었다. 하지만 포졸들이 그곳까지 와서 서응권 부부를 체포하려 했으나 찾지 못하자 어린 자녀 셋을 해치고 돌아갔다.
 어린 자녀들의 죽음을 알게 된 서응권과 부인 윤씨는 함께 김해 관아에 자수했다. 부부는 혹독한 문초와 심문을 받고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이후 부부는 이미 잡혀와 있던 다른 교우들과 함께 관아에서 교살되어 순교하였다.
 그들의 시신은 인근 야산에 아무렇게나 묻혔다. 2달 후 자녀와 친척들이 관의 허락아래 시신을 옮기기 위해 구덩이를 파니 시신이 상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정말 하느님께서 보살피셔서 기적이 일어났구나!’ 하며 감탄하였다. 가족들은 순교자의 시신을 선산에 모시려 했지만 친족들의 반대로 김해시 주촌면 내삼리 인근 야산에 임시 안장을 했다가 1909년 4월 순교자의 삼남 서석수 비오가 현 위치(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산 106번지)에 모셨다.

 족보 연구를 통해 본 서응권 순교자의 이름은 항렬에 따른 족보상 이름이 응권(應權)이고 자(字)는 선겸(善兼)으로 나온다. 하지만 순교자의 죽음을 부끄럽게 여긴 문중에서 선산에도 못 들어오게 한 사실을 생각한다면 순교자의 이름을 족보에 제대로 올렸을 리 만무하다. 심지어 성묘를 할 때에도 순교자의 이름은 몰래 옹기에 적어 이름이 보이지 않게 뒤집어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조선시대의 범죄 사실에 사람들이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되자 1950-60년대에 걸쳐 순교자 집안의 족보가 만들어지면서  순교자의 순교사실을 부끄럽게 여긴 문중에서 다른 이름으로 올렸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순교자의 족보상 항렬에 따른 이름인 응권(應權)이 순교자 묘소 비석에 새겨진 이름과 비교해 같은 것으로 보아 같은 인물임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아무튼 여러 자료와 정황상 순교자의 실제 사용 이름은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대로 서성겸(徐聖兼)으로 여겨진다.


 서응권 순교자의 순교사실은 당시 살아남았던 세 자녀에게는 두려움이 되었고 집안에는 큰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순교자 직계 가족들은 숨어 지내다시피 살아왔다고 전해진다. 순교자의 5대 종손인 서성효 마태오의 증언에 의하면 집안에서 성묘를 할 때 조상님들의 세례명을 적어 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른 조상들의 이름과 세례명은 다 기록되어 있는데, 항상 깨어진 옹기 그릇 뒷면에 요한과 안나라는 이름을 적어 보이지 않는 곳에 따로 놓아두고 제사를 지낸 이야기를 집안 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정황상 순교자와 부인 윤씨의 세례명이 각각 요한과 안나로 여겨진다.


『승정원일기』 고종 5년 윤 4월 23일, 류홍열,『한국 천주교 교회사 하권』p. 175, 김구정,『영남 순교사』 p.335 참조.

 

마백락,『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pp.735~738.

 

 

 

■ 관련 자료 - 1
승정원일기
(고종 5년 윤4월 23일)

의정부가 아뢰기를, "방금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 구주원具胃元의 장계를 보니, 부산 첨사 윤석오尹錫五가 조목조목 정장한 것을 낱낱이 들어 아뢰기를 '한 수상한 사람이 신초량리新草梁里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잡아다가 조사해 보니 성명이 박근기朴根基라는 자였습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정서한 편지 한 장과 조그만 종이 한 조각이 나왔는데,몹시 말이 불궤한 내용으로 종적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다시 엄히 조사하자, 서양인들이 왜국과 통상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사서邪書를 함께 배운 서군서徐君瑞, 서달서徐達瑞, 서성겸徐聖兼, 서성달徐聖達, 노재익魯在益 등 다섯 놈과 함께 출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노재익은 하동河東 땅으로 갔고, 서군서 등은 김해金海로 갔는데 윤달 그믐날 대구부大邱府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 하였으며, 자신은 관시館市하는 날을 기다려 연줄을 타고 들어가서 이 편지를 전해주려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격식을 갖추어 엄히 가두어 놓고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으며,나머지 무리 서군서 등 다섯 놈과 사학邪學을 배운 최태진崔太眞, 고한진高漢鎮은 기한 을 정해 놓고 체포하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죄인들은 범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판례가 이미 이루어져 있으니,평범한 죄인들과 몰 밀어 똑같이 취급할 수 없습니다. 박근기는 우선 동래부東萊府에 단단히 가두어 놓고서 다시 통지를 기다리도록 하고, 나머지 무리 일곱 놈도 영남과 호남 양도로 하여금 기한을 정해놓고 체포한 뒤에 보고하라는 내용으로 엄히 신칙하여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 한국 천주교 교회사
하권 175면
이러한 때에 또 하나의 시끄러운 일이 부산 지방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즉, 부산 첨사 윤석오尹錫五가 교우 박근기를 잡아 문초하게 되니,그는 서양 사람이 일본과 통상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교우이던 서군서, 서달서, 서성겸, 서성달, 노재익 등과 더불어 길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리하여 노재익은 하동으로 가고,서군서 등 4명은 김해로 가서 윤4월 그믐날에는 대구에서 모이기로 약속하고, 특히 박근기는 동래에서 일본인과 의 사이에 시장이 열리는 틈을 타서 편지를 그들에게 전하고자 꾀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경상 좌수사 구주원具胃元의 보고로 중앙정부에 알려지게 되니, 정부는 그날 23일에 명을 내리어, 박근기는 잠시 동래부에 가둬두게 하고,경상도 전라도 감사로 하여금 남은 무리들을 한시 바삐 잡아들이게 하였다. 이로 보면,그때의 교우들은 정부의 엄한 감시로 말미암아 서쪽 바다를 거쳐 청국과의 사이를 왕래함이 정말 어려워지게 된 것을 알고 남쪽의 일본을 거쳐서 서양인과의 사이에 통상의 길을 트는 한편,신교의 자유를 얻고자 꾀하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영남 순교사 335면 양인이 왜국과 통상한다는 말을 듣고 같은 교인 서군서, 달서, 성달,성겸徐君瑞, 達瑞, 聖 達, 聖兼과 노재익魯在益 등 다섯 사람이 함께 떠나, 노재익은 하동河東으로 가고 서군서 등 네 사람은 김해로 가서 윤 4월 그믐에 대구에서 서로 만나기로 기약하고,박근기는 그곳 관시일官市曰(왜인과의 사이에 저자가 베풀어지는 날)을 가리어, 거기로 들어가서 이 글을 왜인에게 전하고자 한다 라고 하였다.

 

■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 737면~738면

서성겸은 김해 노루목 본가에서 체포 소식을 듣고 급히 부인 윤 씨와 함께 피신했다. 장남 석원(베네딕토)에게는 동생들을 잘 보살피라고 일렀다. 부부는 마을 인근 공동묘지에 있는 낡은 움막에 숨었다. 장례 를 치룬 뒤에 버리는 것들을 모아두는 곳 이었다. 움막에서 3일을 버틴 뒤에 밤을 틈타서 나와 보니, 뜻밖에도 6자녀 중 3자녀가 포졸들에게 칼을 맞아 죽은 끔찍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큰아들 석원(20세)과 둘째 석형(16세)과 셋째 석수(13세)는 동생 을 돌보라는 부모의 부탁을 받았지만 포졸들이 갑자기 덮치자 당황하여 동생을 버려둔 채 도망갔던 것이다. 포졸들이 마을을 덮치며 서성겸의 집이 어디냐고 묻자, 동네 아이들이 곧 바로 가르쳐 주었다.
포졸들은 집안에 들어서면서 "너희 부모 어디 있냐?"며 아이들에게 무서운 얼굴로 다그쳐 물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모릅니다."라고만 대답했다. 이에 화가 난 포졸들이 아이들을 해친 것이다. 그때 죽은 자녀는 아들 2명과 딸 1명이었다. 부부는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우리 대신 어린것들이 죽고 말았으니 우리만 살아서 무엇하겠느냐? 차라리 자수하여 어린것들과 함께 순교하자."며 관가에 달려가 스스로 자수했다. 관헌들은 이미 잡혀온 신자들과 함께 이들을 심하게 심문했다. 그리고 쭈뼛쭈뼛한 쇠 송곳 여러 개를 불에 달구어 세워놓고는 "너희들이 앞으로도 교를 믿으려 한다면 이 송곳들을 밟고 지나가고, 안 믿겠다고 한다면 지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외쳤다. 그러자 순교자와 부인은 뜨거운 송곳들을 밟고 지나갔고 다른 많은 신자들도 지나갔다. 이후에도 포졸들은 이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다. 물론 그때마다 '믿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들은 풀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끝까지 신앙을 고백한 서성겸 부부와 남은 교우들은 모두 순교하였다. 그들이 죽은 뒤 시신은 인근에 구덩이를 파고 함께 묻었다. 그러나 2달 후에 자녀와 친척들이 시신을 옮기기 위해 구덩이를 파니 신비롭게도 시신들이 상하지 않은 채 그대로 살아 있는 모습처럼 있었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정말 하느님께서 보살피셔서 기적이 일어났구나!'하며 감탄하였다. 시신을 찾은 뒤 매장을 위해 다시 염습을 하려하자 그제야 시신에서 피가 나왔다고 한다. 이렇듯 서성겸 부부와 다른 교우 들은 믿음을 증거하다 장하게 순교하였다. 그 후 서성겸의 남은 자녀인 석원, 석형, 석수, 삼 형제는 부모들과 같이 순교는 하지 않았지만 계속 노루목공소에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후손들을 많이 낳았다. 그들의 후손 중에는 공소회장을 역임한 5대 종손 서성효(마태오)와 서정의 수사(베네딕도 수도회), 서경윤 신부(베네딕도 수도회), 서원열 신부(마산교구)가 있으며, 최재선 주교(부산교구)와 박도식 신부, 박문식 신부(대구대교구), 김재문 신부(안동교구)는 순교자의 외손이 된다.

(순교록 작성자 마백락, 증언자 서 안나, 서 에우랄리아, 서 크리소스토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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