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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8 14:23

백서帛書 읽는 밤

조회 수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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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체 가톨릭문인회
저 자 문정임 젬마 ● 시인
가톨릭마산 발행호수 2282
발행일자 2017-12-03
몇 년 전 본당의 날 행사로 배론성지에 간 적이 있다. 얄팍한 신심은 성지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왔지만 마음에 남아 있던 한 곳은 황사영 토굴이었다. 이름만 들어본 성인의 기념비적인 장소. 구조물은 그렇게 리얼하진 않았지만 역사적 현장이라 하니 상상이 굼실 피어올랐다. 10대 진사 급제자에게 왕은 20살이 되면 친히 일을 맡기겠노라 약속한 이 전도양양한 젊은이가 왜 이 깊디깊은 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한 장의 비단 조각에 목숨을 건 편지를 써나갔을까. 

해외교포 사목을 하다 오신 신부님을 몇 신자들과 찾아뵈올 기회가 있었다. 고이 간직해온 그분의 수상집을 들고 가서 사인을 받아오리라. 책은 1993년 도판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다. 준비해 간 다과를 드시는 동안 서가를 훑어보는 우리에게 예의 그 인자하신 음성으로 마음에 드는 책 있으면 가지라 하셨다. 얼른 『황사영의 백서』를 신부님 수상록과 함께 집어 들었다. 좋아한 것도 잠깐이었다. 여름 무렵 본당 사무실 앞에 단정한 글씨로 쪽지가 붙어있었고 소장하던 책이니 읽고 싶은 사람은 가져가라 했다. 1970년 대판 책 몇 권을 산타 선물같이 들고 온 중에도 이 책이 또 포함되어 있었다. 계시같이 결국 3권의 다른 편집과 장정본을 가지게 되었다. 이럴게 아니라 꼼꼼하게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배론성지본 까지 3권을 비교, 검색해보고 하다가 드디어 필사를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임금이 손 한 번 잡았다고 손목에 천을 두르고 다녔다는 낭만 논객, 당대 최고 지식인 가문의 사위, 그리고 천주님을 받들어 모신 신예 학자… 그리고 거열형. 

이 목련꽃 같은 삶의 숨은 뜻은 무엇이었나. 각 권마다 역자들이 단락을 문맥에 맞추어 나누어 놓았으나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야말로 한문은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조차 애매한, 이 한 맺힌 문장을 나 베껴보리라. ‘정말 무모한 생각이었나, 철부지의 과도한 표현이었나, 반드시 마주해야 할 시대의 고민이었나.’ 한 자 한 자 옮겨 적는 동안 자꾸 토굴이 눈에 어른거렸다. 기록은 그 기간이 8개월 정도라 했다. 이 순도 높은 인간 유형의 포부와 누리고 싶은 세계, 개인의 죽음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는 그 문제의식에 송곳이 찔리듯 아픔이 전해졌고 번역을 통해서도 지하 무덤의 흙냄새가 묻어났다. 두렵고 부럽고 부끄러웠다. 후대의 평가는 제 각각이다. 하지만 그런 무모 하달 정도의 도전이 아니고서 세상이 어디 옴쭉이나 할 생각이든가.

어둠이 깊숙이 익어가는 가을밤, 다시 서늘한 흰 비단 조각 같은 문장을 소리 죽여 읽어본다. “이 박해가 비록 끝난다 해도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 없으면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이 이 나라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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