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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체 가톨릭문인회
저 자 이현숙 아마타 ● 수필가
가톨릭마산 발행호수 2302
발행일자 2018-04-22
1980년대 일본에서의 일이다. 고베행 전차에 올라서자 맞은편에 동그맣게 앉은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생면부지인데 왠지 낯설지 않았다. 언저리에 자리를 잡고 유심히 그녀를 지켜보던 그때, 소지품으로 추정되는 색동 테두리 패턴의 쇼핑백이 설핏 보였다.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을 듯해 할머니를 향해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한국인에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와 오사카에 터를 잡은 위안부 피해 여성이다. 타국 땅에서 수십여 성상을 보냈지만 모국에서 날아온 동포의 앳된 얼굴을 마주하기는 처음이라며 연신 싱글벙글하셨다. 그간 얼마나 모국어에 굶주리셨던지 진한 경상도 억양의 우리말과 일본 말을 섞어 달뜬 어조로 이야기하시는 모습이 열여섯 소녀와 진배없다. 또한 친인척의 안부라도 묻듯 전두환 대통령은 (정치를) 잘 하느냐, 칼라 TV는 있느냐, 배곯는 사람은 없느냐와 같은 질문이 좀체 끝날 줄 몰랐다. 헤어질 때는 치마 속 고쟁이 주머니에서 아이스크림 값이라며 천 엔을 꺼내 기어이 손에 쥐여주셨다. 영락없는 우리네 두루춘풍 시골 할마씨였다. 재일 한국인에 대한 냉대 속에서 신산한 삶을 이어 오셨으련만, 이제는 애들이 장성하여 어미를 깍듯이 봉양하니 힘든 시절은 다 지났노라 웃으시던 기억이 선하다. 

2015년 12월 체결된 ‘한·일 위안부 협상’은 누구를 무엇을 위한 합의인가. 피해 당사자의 한과 응어리를 놔둔 채 성공적인 합의라 평가할 수 있을까. 독일과 일본은 같은 전범국이나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이후의 대처 방식은 사뭇 다르다. 1970년 12월,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 꿇었다. 그날의 반성과 사죄의 태도는 지금껏 일관되고 세계인의 대다수는 그들을 용서했다. 일본도 독일처럼 지난 과오를 깊이 뉘우치고 과거의 만행을 솔직히 시인했더라면 상황이 어찌 변했을지 모른다. 왜 독일은 되고 일본은 안 되는가. 

일본인은 ‘恥を知れ.(하지오 시레)’ 즉 ‘부끄러움을 알라.’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여긴다. 그런 국민이 자국의 부끄러운 역사는 애써 외면하고 부정한다. 상대방을 먼저 용서치 않으면 아픈 기억을 떨쳐 내기 어렵다는 것도 안다. 문제는 가해 정부가 출연한 얼마간의 기금만으로 쉽게 가슴에서 지워질 상처가 아닌 데 있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은 법적 배상이나 의례적 수사가 아니다. 꽃 같은 청춘이 짓밟힌 것도 모자라 평생토록 자책과 죄의식 속에 살아오신 분들이다. 왜 부끄러움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몫이 되어야 하는가. 이제 국내 생존자 29분만을 남긴 채 모두 유명을 달리하셨다. 꿈 많던 소녀 적에 피멍 들고 날개 꺾인 우리 모두의 슬픈 꽃과 나비를 위하여, 다만 이 한순간만이라도 마음을 모아 주님께 기도 올려 주십사 간곡히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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