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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9 02:27

봄꽃의 부활

조회 수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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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체 가톨릭문인회
저 자 이준호 라파엘 ● 수필가
가톨릭마산 발행호수 2308
발행일자 2018-06-03
올봄의 꽃들은 세상에 나오는 순서를 잊어버린 듯하다. 매화, 산수유꽃, 벚꽃, 진달래, 목련이 한꺼번에 몰려와 봄의 5중주를 신나게 연주하니 말이다. 달력에 봄 손님들이 찾아오는 시기를 슬쩍 표시해놓고 화객을 하나씩 맞이해야 봄을 완상하는 길일 터인데! 봄꽃들은 잠시 북적이더니 물고기 비늘 마냥 꽃잎은 바닥에 쭉 깔리고 나뭇가지엔 푸른 잎이 돋았다. 

한 해는 금방 간다고들 하지만 봄꽃을 기다리는 일 년이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아스팔트를 녹일 듯한 폭염을 견뎌내는 것은 기본이고 뼈마디 시린 진눈깨비도 느긋한 눈빛으로 쓰다듬어야 한다. 얼음장 밑으로 물살이 세차고 산머리의 눈이 녹기 시작하면 산수유의 노란 안개도 산허리에서 채비를 서두른다. 

그렇게 찾아온 봄을 카메라에 담고자 산사의 왕벚꽃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행락객들 틈에서 계곡을 따라 걸었고 봄의 정취를 맡았다. 산에 가면 산새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도 좋지만 낯선 이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도 재미있는 법이다. 한참을 오르다 수행자의 선방 앞에 이르렀고 이끼 낀 돌담 아래 발그스레한 금낭화를 발견했을 때였다.

“처자의 수줍은 마음을 닮은 듯한 금낭화와 수행자들의 거처 공간이라니 참 어울리지 않지요? 금낭화는 수백 년을 이 자리에서 나고 죽은 뒤 시신은 씨앗이 되고 다시 피었습니다. 사실 고목 못지않게 나이가 많죠.” 꽃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보이던 어르신의 이야기가 내 귓속으로 강렬하게 빨려 들어왔다. 

꽃이 지더라도 영원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꽃은 죽음과 소멸의 솜 이불을 덮고 기나긴 겨울을 준비한다. 꽃은 봄에 다시 기지개를 펼 것이다. 꽃에게 고백하였다. 화려한 슬픔의 봄이 지나면 모두들 꽃은 죽었다고 말하지만, 외려 부활의 생명을 키우고 있었음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봄이 다시 올 때까지의 시간은 여전히 길다. 그러나 지난 시대의 죽음과 소멸을 기억하며 견뎌내야 한다. 이는 남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이다. 기억은 소멸한 것을 잠시 살려놓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하여 봄은 늘 기다리게 되는 영원한 희망이다. 열두 제자들이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바람 부는 여름의 초입에서 나는 봄꽃의 부활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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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단 체 가톨릭마산 발행호수 저 자 조회 수 발행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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