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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8 11:45

호루라기 소리

조회 수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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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체 가톨릭문인회
저 자 김말순 베아따 ● 수필가
가톨릭마산 발행호수 2321
발행일자 2018-09-02
손목시계를 습관적으로 들여다보면서 아슬아슬한 순간에 액셀을 밟았다. 처음부터 신호를 위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갑자기 지금 지나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오른쪽 발에 힘을 주게 되었다. 시댁 집안 친척의 결혼식에 늦지 않으려는 조바심과 신호등의 주황 색깔에 재빨리 지나가도 된다는 악마의 속삭임 때문에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가로수 뒤 코너에 숨어 있던 의경이 갑자기 나타나 호루라기를 불며 멈추라는 손짓을 한다. 브레이크를 밟는다는 게 당황한 나머지 액셀을 밟으며 속력을 내고 만다.

누구나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 양심의 잣대로 올바르게 대처하고 싶어도 혼란한 상태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채 본의 아니게 나쁜 결과를 초래할 때가 있다. 결국 좋은 쪽으로 처신하지 못한 허물이 확연히 드러났을 때 때늦은 후회와 죄책감으로 무척 괴로워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몇 년 전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신호등을 생명처럼 지킨다는 다짐을 했건만 또 이런 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말이다. 방금 좌회전을 했을 때는 분명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지나가도 별 탈 없다는 신호가 재빠르게 찾아왔기에 새털처럼 가볍게 지나갈 수 있었다. 내 사고는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 대체로 자유로운 편이다. 외향적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내향적이기도 한 성격은 어느 순간 나를 급하게도 만들고 느긋하게도 만든다. 분명 빨간불로 바뀌려는 순간, 지금 가도 괜찮다는 지시가 급히 전달되었기에 좌회전을 감행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어난 일이 언젠가는 나에게 잘못된 의식이 뿌리를 깊이 내리면 내릴수록 그것을 확실히 단호하게 바뀌어야 한다. 어쩌면 코너를 지키고 있던 경찰관은 미래에 일어날 끔찍한 일을 미리 막기 위해서 내 앞에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덫에 걸렸다는 억울함만이 크게 부각되지만, 한마음 돌려 생각하면 훗날에 일어날 불행한 일을 이만큼 축소하여 나타낸 건 아닐까로 정리가 된다. 신호위반으로 놀라서 들었던 호루라기 소리가 이젠 마음을 차분하게 정리해 주었다.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라는 책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세상이 달라지기를 바란다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 나 자신부터 달라져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달라진다. 나 자신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일부이다.’라고 말이다.
차들이 서서히 움직인다. 누군가에게 평범한 오늘의 일상이 어떤 사람에게는 잊히지 않는 악몽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길에서 만나고 길에서 헤어지는 삶 속에 올바른 주님의 속삭임들이 귓속을 든든하게 채울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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