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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 하느님의 사랑 방식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곳곳에서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감지하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 신앙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기(사도 2, 24)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부활하신 분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가득 받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부활 축일을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절대적이고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이 생각할 수조차 없고, 인간의 말문마저 막아버리는 하느님 사랑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희망 속에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머물 수 있는 곳 그리고 머물러야 하는 곳은 언제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통의 부재와 거부당한 사랑

오늘날 우리는 소통이 부재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소통대신 분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상대의 말문을 막아 버리고, 무조건 자신의 말을 먼저 들어 주기만을 강요합니다. 결국 소통의 부재는 관용과 사랑의 부재에서 출발하여 오해와 독선을 불러일으킵니다.


십자가는 소통과 친교를 거부당한 사랑의 결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의 선포 안에서, 인간과의 소통과 친교 안에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며 당신의 사랑을 선사하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거부에 부딪힙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느님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인간을 마주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강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사건

십자가 사건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랑 사건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자신의 모든 것을, 심지어 자신의 생명마저 내어놓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 하느님을 거부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유로 인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며 인간과 소통하고 친교를 맺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 앞서 인간을 찾아오시고, 인간보다 먼저 인간과 함께 동행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목숨을 걸고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당신 십자가의 죽음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랑 때문에 당신을 한없이 낮추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이시지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이로써 예수께서는 죄와 죽음에 놓여 있는 인간의 처지에 동참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처신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위한 아버지의 자기희생, 아버지를 위한 아드님의 자기희생, 성령을 위한 아버지와 아드님의 자기희생으로 십자가의 어둠 속에 들기까지 전적으로 관여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버림받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모습은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이사 52,14),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으며(이사 53,2), 멸시, 학대, 천대받는 모습이었습니다(이사 53,3-4).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에게서 가장 멀리 있음을 그리고 당신께 대한 인간의 가장 강한 부정을 의미하는 십자가를 하느님께서는 감수하며 당신 사랑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 맞서는 인간의 거부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이 생동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이며,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십자가의 역설

부활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죽어야만 새로운 생명이 돋아난다는 역설이 부활의 전제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희생의 모습으로, 인내의 모습으로, 양보의 모습으로, 관용과 침묵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순교의 모습으로 그리고 자기 퇴출의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벗어나 타인중심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나를 뒤로 물리고 너를 나보다 먼저 앞세우는 삶의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자신을 희생시키고 죽이고 깨트리는 일 없이는 십자가의 죽음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던지는 예수님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이 비로소 가능합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 위에 새로운 부활의 생명이 싹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려고 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그분처럼 추방당하고 미움받고(마르 13,13; 요한 16,2 참조) 고난을 겪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요약하고 완성하고 계시합니다. 그분은 죽도록 하느님을 섬기고 인간에게 봉사함으로써 철저한 순종과 완전한 봉사 한가운데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역설을 우리는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구원인지는 십자가를 구체적으로 지고 따름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삶 속에서 온전히 믿고 따름으로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 십자가를 따름과 부활에 대한 믿음의 길을 떠난다는 것은 생명과 마주한 죽음의 어둠을 감지하고 목숨을 다해 저항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폭력과 죄와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고 고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들 안에서 우리는 고통받고 희생당하는 모든 이의 울부짖음을 한데 묶어 고발하고 해방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분의 십자가에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하느님의 사랑 방식이 계시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분을 따름으로 우리 십자가의 길들 역시 부활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을 알고 믿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마태 16,24) 한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꺼이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르고자 다짐합니다. 이 길을 따르면 부활이 가져다주는 결실, 곧 영원 생명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순교 영성

저는 올해 발표한 사목교서에서 “순교 영성으로 세상을 복음화”하자는 목표를 제시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에서 순교 영성의 원형과 핵심을, 그리고 그분의 철저한 이타적 삶에서 순교 영성의 정점을 찾는 삶을 살자고 호소하였습니다. 죽음으로 영원을 사는 순교 영성이라는 본보기를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복음화에 주력하자고 다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뻐하고 경축하면서, 또한 세상의 온갖 모순들과 우리 사회의 소통부재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키워 나가고, 죽음의 어둠 속에서도 부활의 빛을 밝히며, 희망의 삶을 살자고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의 큰 축복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향한 갈망의 끈을 놓치지 말고 붙잡으시기를 기원합니다.






2010년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교구장 안 명 옥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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