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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신앙
2020.02.21 08:27

낮은 데를 비추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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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은정 엘리사벳 교수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묻기를 “랍비, 누가 죄를 지어서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혹은 그의 부모입니까?”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기 위한 것입니다.”(요한 9,1-3) 

 

 

이청준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안요한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소설이지만 이청준의 입을 빌려 말하는 안 목사의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안요한 목사는 30대에 실명한 채 노숙자로 떠돌다가 목회자가 되어 시각장애인을 위한 새빛교회를 세운 사람이다. 

 

작품 속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안요한은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신앙에 대한 의심을 품고 신앙인로서의 삶을 거부한다.

그러던 중 미국의 한 군사학교의 한국어 교관으로 선발되는 행운을 얻게 되는데,

장밋빛 미래를 준비하던 그에게 뜻밖에 포도막염이라는 안질이 찾아오고 결국 완전히 실명하고 만다.

아내마저 떠나고 난 ‘실락원’의 세계에서 그는 자살까지 시도하는 등 절망에 빠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서울역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곳은 더 이상 흘러갈 곳을 잃은 구두닦이, 껌팔이, 넝마주이 같은 이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가장 낮은 그곳에서 그는 구두닦이 소년 진용이를 만난다.

그는 무허가 판잣집에서 중풍으로 누워 있는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이였다.

어느 늦은 밤, 차마 길거리에 그를 두고 떠나지 못한 진용이가 발길을 돌려 다가온다.

 

이내 진용이 나의 두 손을 끌어 쥐면서 얼굴과 가슴을 무릎 위로 던져 왔다. 그리고는 내게 그 작은 등을 내맡긴 채 더럽고 남루한 나의 무릎을 눈물로 뜨겁게 적셔 오기 시작했다. 

 

서울역을 오가는 수많은 행인들은 무심히 지나갔지만, 그 가엾은 아이는 기꺼이 손길을 내민 것이다.

“그 안타까운 손잡음, 그 뜨거운 눈물, 그것보다 더 깊고 분명한 인간의 말이 있을 수 있던가.”  

 

진용의 손에 끌려 간 허름한 집에서 안요한은 깨닫는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라고,

진정 부끄러운 것은 남의 짐을 나누어지려는 생각을 못 했던 일이라는 것을.

가진 것 하나 없는 진용이는 오히려 나의 짐을 나누어지고자 하는데, 그 자신은 스스로 짐이 되는 것만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진용의 방에는 교복과 모자가 몇 년째 걸려 있었다.

아이는 언젠가 학교에 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흐느끼며 말하고, 그 순간 그 방은 하느님의 계시의 장소가 된다.

그에게는 누군가에게 나누어줄 배움의 지식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그에게서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는 소명인 것이다.

위를 바라볼 때는 보지 못했던 빛을 그는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발견하였다.

그는 진용의 손을 맞잡고 기도한다. “아직도 제게 나누어 줄 것을 남겨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미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듯이 이후 안요한은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고백하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 안수까지 받게 된다.

그리고 육신이 아닌 영혼의 눈으로 보는 빛, 그 새빛을 시각장애인에게 전파하는 ‘새빛교회’를 시작하고,

고아나 거리 아이들을 위한 야간학교도 개설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줄곧 성직자로서 희망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서울역의 수많은 행인 중 하나일지 모른다.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한 사람을 제사장도, 레위인도 못 본 체 지나갔지만, 한 사마리아인은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돌보아주었다.

진용이가 그렇고, 안요한이 노량진에서 만나는 또다른 구두닦이 소년 방울이가 그렇고,

또 안요한 자신이 그렇듯이, 그들은 낮은 곳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이었다.

그래서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하느님께 바치는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에게 드리는 하느님의 기도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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