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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칼럼
2020.02.13 09:06

신앙과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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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민아 마리아 교수

그들은 불안했을 것이다. 예수가 떠난 자리에 남겨졌던 사도들 말이다.

공범으로 지목되어 체포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도 있었겠지만, 믿고 사랑했던 그이가 동료의 배신으로 살해당하고,

꿈꾸었던 미래가 그토록 허무하게 사라진 자리에서 불안은 공포보다 더 서늘하고 집요하게 사도들의 마음을 잠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불안은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말한 ‘실존적 불안’과 같은 종류일지 모른다.

틸리히는 구체적 대상이 있는 공포와 달리 불안은 극복하고 맞설 대상이 없기에 인간을 더 취약하게 만든다고 했다.

내쳐진 운명, 의미를 상실한 공허함,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무력감과 죄책감,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사도들이 맞닥뜨린 상황에는 맞서 싸울 대상이 없었다.

그러기에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 불안과 혼란의 와중에 죽은 예수가 살아 왔을 때 사도 토마스가 보였던 반응은 의심이었고,

질문이었다. 그는 솔직하고 투명했다.


토마스는 워낙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에게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질문하여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답을 듣기도 했다.(요한 14,5-6)

살아 돌아온 예수 앞에서도 그는 여전히 질문하고 있다.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1571-1610)는 그의 그림  <의심하는 토마스>에 그 순간의 긴장을 적나라하게 담았다.

스스로 옷자락을 걷어 옆구리를 드러낸 예수는 토마스의 손목을 잡고 상처의 절개부를 만져보게 하고 있다.

이마와 양미간에 주름이 가득한 토마스는 때 묻은 손가락을 예수의 상처에 깊숙이 찔러 넣는다.

마치 부검의처럼 진지한 그의 주변에 주체할 수 없이 궁금한 눈으로 상처와 손가락을 보고 있는 다른 두 사도들이 있다.

그들도 토마스 못지않게 불안하고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다만 적극적으로 질문하지 않았을 뿐이다.


불안과 의심을 이번 달 주제로 꺼냈으니, 요즘 모두를 불안과 의심으로 몰고 있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이야기도 해야겠다.

불안에 짓눌린 인간의 전형적인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혐오와 맹신이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창궐하는 불안에 우리는 혐오와 맹신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곳저곳에서 퍼져 나온 전염병에 대한 확실치 않은 근거들을 인격화하여 타자에게 투사하고,

마치 ‘그들’을 거부하고 배제하면 바이러스가 퇴치될 것처럼 인종차별과 혐오를 부끄럼 없이 쏟아내고 있다.

불안할 때 인간은 확실한 무언가를 간절하게 원한다.

그러기에 익명의 다수가 퍼뜨리는 정보들, 정치인들의 정략적 발언이 대중의 신조와 신념이 되어버렸다.

믿기 어렵고 그로테스크한 정보가 오히려 빠르게 확산된다.

자극적일수록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혐오와 맹신 - 불안에 대한 이 대응 방식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모든 차별과 혐오의 역사에는 기득권자들의 생활권이 위협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고, 불안을 부추기는 거짓 선동이 있다.


본론으로 돌아와 예수가 불안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자.

예수는 불안을 합리적 의심과 질문으로 표현한 토마스를 내치지 않았다.

그 역시 합리적으로 대응했다.

지극히 과학적인 방식으로 증거를 제시하며 직접 관찰하고 만져볼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결국 손가락을 넣어보고 난 후 토마스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Dominus meus et Deus meus)”이란 엄청난 고백을 한다.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시인한 최초의 고백이다.

실증을 통해 확신을 얻고 불안을 극복한 듯 보이는 토마스에게 예수는 한발 더 나아가 또 다른 가르침을 준다.

실증을 통한 믿음 외에 관계를 바탕으로 한 믿음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는

예수의 응답에 등장하는 그리스어 단어 ‘πιστεύω’는 ‘믿다’ ‘신뢰하다’ ‘맡기다’를 뜻하는 동사로,

문맥과 문장의 목적어에 따라 의미가 결정되는 중립적인 단어다.

이 단어 자체에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어떠한 권위도 포함되어 있지 않기에 맹목적,

무조건적인 믿음을 종용하는 뜻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즉, 예수는 인격이 상실된 어떤 것도 - 그것이 권위이건, 실증적 사실이건, 혹은 선동이건 - 믿으라고 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하고 물으며, 불안해하는 토마스에게 사람 예수를 상기 시키고 있다.

그와 토마스가 쌓아온 관계, 사람과 사람, 인격과 인격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그 관계 속, 서로의 깊은 신뢰와 사랑을 일깨우고 있다.

신뢰와 사랑이 바탕이 된 관계는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솔직한 질문은 성숙한 관계에 반드시 필요하다.


진지한 신학적 질문에는 대부분 실존에 대한 불안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불안은 하느님의 무한한 신비 앞에 선 유한한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요소다.

불안을 거부하고 확신과 신념만 붙잡으려 할 때 믿음은 우상숭배가 된다.

그 우상숭배는 나와 다르거나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혐오로,

또 나의 불안을 잠시 잠재워 줄 얄팍한 확실성에 대한 맹신으로 표현된다.

믿음은 어떤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신념이 아니다.

믿음은 하느님과 내가 함께 쌓아 가는 관계다.

모든 사랑의 관계가 그렇듯, 나의 이성과 감성을 사랑하는 이, 하느님께 전인적으로 던지며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성숙해 가는 실존적 참여다.


얼마 전 내가 가르치는 신학수업에서 대학생들과 ‘신앙과 의심의 관계’에 대해 토론했다.

문득 궁금해져서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목자와, 확신과 신념에 가득 찬 사목자 중 어느 사목자를 더 신뢰하는가?

거의 모든 학생들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사목자를 더 신뢰한다고 대답했다.

왜 그런가 물었다.

한 학생이 대답한다.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것은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젊은 학생들은 확신과 신념만 가득 찬 사목자에게서 무지와 편견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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