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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민아 마리아 교수/ 조지타운대학교

인공지능 ‘알파고’를 상대로 벌인 대국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승자가 되었던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이 지난 19일 은퇴했다.

은퇴 대국의 상대로 그가 택한 상대는 흥미롭게도 ‘한돌’이라는 국내 바둑 인공지능인데 대국 방식은 접바둑 치수 고치기다.

두 사람의 바둑 실력이 벌어질 때 약한 쪽에서 미리 몇 점을 깔고 시작하는 바둑이 접바둑이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이세돌 9단이 먼저 두 점을 깔고 한돌의 백번으로 시작한다.

이 9단이 1국을 승리하면 2국은 정선(이 9단의 흑번)으로 대국한다.

그러나 1국을 패하면 2국은 석 점을 깔고, 2국마저 패하면 마지막 3국은 넉 점을 깔고 둔다.

즉, 이길 수 없음을 전제하고 둔다는 말이다.

담담하게 대국 방식을 설명하는

이 9단의 인터뷰를 보며 나는 마음이 착잡했다.

바둑은 ‘예술’이다, 두 사람의 창의성이 만나 침묵 가운데 만드는 ‘하나의 작품’이라 하던 그가 이제 더 이상 인공지능을 이길 자신이 없어 은퇴하며

마지막 대국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끝까지 실험하는 모습이 어쩐지 처절하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인공지능이 지배할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미래 앞에 인간의 창의력이 지닌 존엄성을 내걸고 홀로 맞서는 순교자 같기도 하다. 

 

이처럼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는 세상에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인공지능과 인간의 차이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결정적인 것 중 하나는 자신의 한계를 자각할 수 있는가,

그 한계에 머물러 성찰할 수 있는가 일 것이다.

지능으로는 벌써 인간을 뛰어 넘었고,

근래에는 감성과 창의력의 영역까지 인간을 넘보는 인공지능은 결코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성찰하지 못한다.

인공지능의 한계는 프로그램 오류에서 비롯된 ‘버그’일 뿐이며 프로그램을 수정하거나 더 나은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극복된다.

신학은 인공지능이 결코 내려올 수 없는 바로 그 지점,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성찰하는 데서 시작된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보여주신 진리를 신앙과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학문이 신학이다.

하지만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지적 능력을 통해 우수한 지식을 개발하여 하느님의 존재를 입증하거나

하느님의 인식을 통찰하고자 하는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 앞에 인간이 지닌 한계를 수긍하고, 그 한계를 드러내는 역사의 지평에 서서,

지평 너머의 초월로부터 다가오는 신비를 우리 삶의 자리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학문이다.

인간이 먼저 나아가 분석하고 계산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초대하신 당신과의 관계에 응답하고,

하느님께서 이미 열어 주신 신비에 신앙으로 참여하며 그 무한한 사랑에 유한한 인간의 언어를 입히는 것이 신학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보여주신 가장 명확하고 결정적인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이다.

한데 예수가 인간에게 온 자리 또한 인공지능이 추론해 낼 수 있는 모든 최고값의 반대편에 위치해있다.

예수는 변두리마을 축사에 지친 여장을 푼 가난한 난민 노동자 부부에게, 고개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약하디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왔다. 예수의 탄생을 가장 처음 접한 이들은 오늘날로 치면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인 목자들이었다.

예수는 평생 ‘갑’이 되어 본 적이 없다.

그는 방랑자요 노숙자였으며 짧은 평생을 오로지 ‘을’들과 함께 살았다.

그리고 그는 꿈꿨던 하느님 나라를 차마 이루지 못한 채 서른세 살 청년의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이 비참한 실패를 통해 부활이란 기적이 일어나고, 그가 꿈꾸었던 세상이 우리에게 열렸다.

그가 바랐던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인간을 단순한 부속품, 폐기 가능한 대체물로 만드는 질서를 거역하는 세상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존재를 그 자체로 귀하게 여기는 세상이다.

거짓과 의심과 미혹의 그림자가 거두어지고 진리가 드러나는 세상이며, 생명이 생명과 어우러져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향하는 세상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 기이한 사람, 기이한 하느님 예수가 드러낸 사랑과 그가 죽어서까지 살리고자 했던 세상을 공부하는 학문이다.

신학은 또 그렇게 기이한 우리의 하느님을 향한 기도다.

우리의 한계를 알고 그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신학은 기도가 된다.

그 신비에 우리를 맡기며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기도가 된다. 

 

<다음달부터 그 신학을, 기도를, 여러분과 함께 하려 합니다.

마산교구에서 <신학칼럼: 지평과 초월>이란 이름으로 부족한 필자에게 귀한 공간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공동체, 역사, 신앙, 성사라는 큰 주제를 중심으로 가톨릭 신학을 풀어갈 여정에 한달에 한번 길동무가 되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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