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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민아 마리아 교수/ 조지타운대학교

텅 빈 성베드로 광장을 프란치스코 교종이 걸어간다.

어둠이 깔리고 비까지 내려 더 공허한 광장에 홀로 선 여든네 살 노 사제의 기도가 적막을 흔든다.

“당신께 간절히 청합니다. 잠을 깨십시오 주님!”

을씨년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거대한 성전 앞에 선 그의 모습이 예수가 죽어 묻힌 빈 무덤을 홀로 지키던 마리아 막달레나와 겹친다.

마리아도 그날 밤 그렇게 기도하고 있었을까.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며,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미래에 몸서리치며, “우리는 모두 길을 잃었습니다. 잠을 깨십시오 주님,” 하며 흐느끼고 있었을까.

“다시 살아나리라” 했던 죽기 전 그이의 말은 마리아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희망이었을까, 믿음이었을까, 아니면 부질없는 위로였을까. 

 

길고 긴 밤이 지난 부활 새벽, 예수는 마리아 앞에 살아 돌아와 모습을 드러낸다.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이 기적의 순간은 그러나 부활 성야 미사처럼 극적이고 웅장하지 않다.

그이는 평범하고 남루한 동산지기 사내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그토록 간절히 기도하던 마리아는 심지어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마리아야” 하고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듣고서야 그의 존재를 알아 챈 그녀는 “선생님” 하고 응답하며 그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는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랑하는 이가 살아 돌아왔다면, 간절한 기도의 결과가 눈 앞에 있다면.

그러나 그이의 반응은 낯설고 어색하기 그지없다. 그이는 안타까운 마리아의 손을 거부하며 말한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요한 20,17) 

 

무덤 앞을 밤새 지키던 마리아에게, 또 그의 부활을 간절히 기다리던 오늘 우리에게 그이가 처음 건네는 부활 메시지는 실망스럽다.

고통과 죽음이 이렇게 끝도 없이 세상을 덮고 있는데, 주일 전례에 참여하지 못한 지 어느새 두 달이 가깝고,

고해성사와 영성체도 하지 못한 채 성주간을 보내고 부활을 맞는데,

이 폭발할 듯한 공포와 무력감을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간절히 붙잡고 싶은데, 그이는 말한다.

붙잡지 말라고. 이 기이한 부활 선포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앙을 겪고 있는 세상은 격변을 예고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감염증이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아직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감염증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이 결코 같지 않으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그 변화는 정치, 경제, 노동, 교육, 환경, 외교, 그리고 일상에서 서로 만나고 소통하고 관계를 이루는 방식에까지

삶의 거시적 측면과 미시적 측면을 아우르며 이미 일어나고 있다.

종교 공동체에 요구되는 변화는 더욱더 본질적이다.

전 지구적 위기를 겪으며 사회가 종교에 요구하고 있는 것은 고통과 죽음을 이길 처방이나 기적, 지혜가 아니다.

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음이 무엇인지 세상은 더이상 궁금하지 않다.

세상이 종교에 요구하는 것은 단지 “모이지 말라”는 것이다.

종교의 정체성과 존재 근거를 흔드는 이 “모이지 말라”는 세상의 요구가 “붙잡지 말라”는 그이의 요구와 함께 오늘 우리에게 부활의 의미를 묻는다. 

 

파스카는 죽음이 새 생명으로 변화하는 신비다. 예수의 삶과 부활 사이에는 죽음이라는 단절이 있다.

죽음 이전의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은 다르다.

살아 숨쉬던 명징한 진리, 예수가 죽음을 거쳐 우리에게 돌아왔을 때, 그이는 우리가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진리로 남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을 부수어 생명의 떡이 되어 우리 삶 안으로 돌아왔다.

부활 이후의 그이는 오로지 우리의 삶을 통해 존재한다.

데레사 성녀의 고백처럼 그이는 우리의 팔과 다리를 통해 움직이고, 우리의 눈과 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그러므로 빈 무덤 앞, “붙잡지 말라”는 그이의 말은 우리가 그를 믿고 그의 복음을 선포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오늘, 감염증의 공포와 혼란 속에서 들려오는 그 부활 선포는 교회가 겉으로 보여지는,

붙잡을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본질로, 생명으로, 그이가 살아 숨쉬는 삶의 한가운데로 돌아가야 한다는 준엄한 요구다.

각 교구들이 감염증 확산을 막기 위해 잠정적으로 미사를 중단한 것은 단지 교회가 사회의 요구에 협조했기 때문에 잘한 일이 아니라,

건물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생명의 요구를 따랐기 때문에 잘한 일이다.

“모이지 말라”는 세상의 요구 속에서 “붙잡지 말라”는 그이의 요구를 들었기 때문에 잘한 일이다.

나아가 온라인으로, 영상으로, 사진과 노래와 이야기로,

공간과 장소의 한계를 넘어 서로 만나고 위로하는 신자들과 사제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감염증이 만들어 낸 죽음의 공포와 단절을 넘어,

껍데기를 벗고 삶으로 깊숙이 살아 오는 그이를 본다.

 

감염증이 걷힌 후 더욱 명확해 질 세상의 변화 속에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교회는 이렇게 “붙잡지 말라”는

그이의 청을 따르는 교회라고 나는 믿는다.

제도와 형식과 절차를 붙잡고 권위를 세우는 교회, 세상 저편의 천국을 담보 삼아 신자들을 모으는 교회, 영성적, 도덕적 편협에 묶여

우리와 너희를 가르는 교회는 죽음 이전의 삶에 머무는 교회다.

스스로 성곽을 허물고 세상으로 들어와 수천 수만의 연약한 생명들을 보듬고 이어주는 교회,

넉넉하고 결이 성글지만 질기고 튼튼한 바구니와 같은 교회가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는 교회다.

“교회가 진리를 갖고 있다”고 천명하지 않고, 교회도 부족하고 혼란스러우니 당신들의 팔과 다리와 눈과 입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교회 말이다.

가르치고 훈육하고 벌주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들어와 세상의 폭력과 분노와 외면 속에

탄식하는 연약한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 그이를 발견하고,

그렇게 상처 받은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달릴 수 있는 교회,

그러나 그이가 그랬듯 삶으로 살아 오는 교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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