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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민아 마리아 교수/ 조지타운대학교

‘의식성찰Examen’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사진의 동상은 젊은 예술가 제레미 라이크먼Jeremy Leichman과 조안 베네필Joan Benefiel의 2011년 작품으로, 미국의 예수회 소속 페어필드 대학Fairfield University의 머피 이냐시오 영성 센터Murphy Center for Ignatius Spirituality 앞에 세워져 있다. 실물 크기의 밝은 색과 어두운 색 두 이냐시오 성인이 거울을 보듯 마주 서 있는 형상이다. 굳게 다문 입, 걷어 부친 소매, 디디고 오르는 두 발의 자세, 두 동상 사이에 흐르는 묵직하고 섬세한 긴장, 이 모든 것이 성찰의 순간에 필요한 의식의 정동靜動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무엇보다 내 눈을 끄는 것은 팔의 모양새다. 언뜻 뒷짐을 진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왼손이 힘주어 오른쪽 손목을 거머쥐고 있다. 마치 오른팔의 움직임을 제어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이냐시오 성인이 왼손잡이였다는 기록은 본적이 없으니, 그에게는 오른손이 익숙하고 빠른 손이었을 게다. 군인 출신이니 그 손은 무엇보다도 칼을 빼고 휘두르며 공격과 방어를 하도록 단련이 되어 있었을 게다. 그 중요한 손을 서툰 왼손이 붙잡고 있다. 의식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공격과 방어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칼로건 말로건, 의식성찰은 나의 결함을 도려내고 변명하고 땜질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식 안에 떠오르는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받아들이며, 하느님께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것이라 말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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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라이크먼과 조안 베네필 <의식성찰>, 2011, 페어필드 대학

 

밝은 색과 어두운 색 중 어느 것이 참이고 거짓인지, 옳고 그른지는 의미가 없는 질문이다. 하느님은 빛과 어두움을 동시에 창조하셨다.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으니”(창세기 1,5) 어둠 또한 창조 질서의 일부분이다. 빛과 어둠은 상보적인 것이며 어둠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연약함을 깨닫는다. 어두운 밤을 지날 때 우리는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 아님을 알게 되고 이끄시는 이의 손길을 찾는다. 십자가의 성요한이 노래했듯, “나를 가장 아는 그분께서 날 기다리시는 그곳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 쪽으로” 밤을 길잡이 삼아 걸어간다. 

 

인간은 빛과 어둠에 모두 노출되어 있기에 누구에게나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는 인간의 불완전한 실존을 드러내는 표상이다. 스스로의 내면을 오래 들여다보면 누구든 결핍 투성이의 비합리적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잔인한 자신의 그림자를 보게 마련이다. 그 그림자를 마주하는 경험은 당황스럽고 수치스럽고 끔찍하다. 그러나 그 경험은 또한 한없이 부족한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고 무한하신 하느님께 나아가는 회개와 구원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림자를 마주 보지 않을 때 오히려 문제가 발생한다. 무시하거나 덮어두거나 피하려 하면 그림자는 우리를 덮치고 우리의 의지를 빼앗는다. 즉, 죄성에 제압되고 마는 것이다.  

 

인간의 죄는 다 이해할 수도, 근원을 파헤쳐 제거할 수도 없는 신비의 영역이다. 죄를 표현하는 성서의 단어는 신약 성서만 보더라도 각양각색이다. 무지(ἀγνόημα), 교만(ὕβρις), 불복종(παρακοή), 넘어짐(παράπτωμα), 율법을 어김(ἀνομία), 경계를 범함(παράβασις), 조화를 깨뜨림(πλημμέλεια) 등, 죄는 다양한 얼굴과 신축성을 갖고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된 선택들과 얽혀 파괴적인 힘을 드러낸다.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정의롭고 존경받는 삶을 살더라도 순식간에 균형을 잃어 비참한 죄의 포로가 되고 마는 나약한 존재가 인간이다. 그러나 나약함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순간 하느님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고백은 하느님의 심판과 저주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인간에 대한 희망과 긍정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죄는 더더욱 신비다. 

 

의식성찰은 이러한 인간의 양면성, 그림자와 희망을 가식 없이 받아들이는 기도다. 의식성찰은 모든 기도가 그렇듯 다른 이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 하여 그 그림자가 마술처럼 제거되는 것도 아니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알 뿐이다. 자신이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며 또 다른 유혹이 닥쳐 올 때 조심하여 조금씩 조금씩 왜곡된 습성을 줄여갈 수 있을 뿐이다. 밝고 또 어두운 이냐시오 성인이 서로에 대한, 아니 스스로에 대한 공격과 방어를 자제하며 다만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듯 말이다. 

 

인간은 스스로도, 타인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림자에 걸려 넘어지는 이웃을 볼 때 우리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기도는 그가 자신의 그림자를 자각하고 받아들이며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빌어주는 것이다. 넘어진 이웃을 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아끼고 신뢰하던 사람이 불현듯 추한 그림자를 드러낼 때, 우리는 상처 받고 실망한다. 그와 공유하던 소중한 신념과 가치가 함께 무너지는 듯하여, 우리는 마치 스스로의 그림자를 거부하듯 그의 그림자도 거부하고 아름다운 것만을 기억하고 싶어한다. 그러는 사이 그림자는 덩치가 커져 사방팔방으로 칼을 겨누고 폭력을 휘두른다. 그렇게 우리는 그를 위한, 또 우리들 자신을 위한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황망한 죽음과 뜻밖의 행적으로 나 또한 비통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을 지나고 있다. 또 다시 시작된 진영 갈등으로 더 마음 아프다. 이미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온 말들에 또 말을 보태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나는 고인을 애도하는 것이 고인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성폭력 피해 고소인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피해 고소인의 입장에 서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고인이 남긴 유산을 폄훼하는 것으로 이해되어도 곤란하다. 외롭고 두려울 피해 고소인과의 연대도, 고인에게 삶을 빚진 이들의 애도도, 내 생각에는 둘 다 존중되어야 할 일이며,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이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오히려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권력을 무기로 삼은 성폭력은, 성평등 정책과 성인지 감수성을 일관되게 주장해온 고인조차 무너뜨릴 정도로 괴력을 가진 우리 사회의 추한 그림자다. 그의 영혼이 왜곡된 습성을 버리고 스스로 원했던 바른 길을 찾도록 나는 기도한다. 또 진실을 밝히고 이 일을 계기 삼아 권력기관에서 일어나는 일상화된 성폭력 문제를 논의하고 방지할 수 대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고인이 지켜온 신념과 가치를 존중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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