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본문시작

2017.02.14 05:38

사라진 입술들

조회 수 52
Extra Form
단 체 가톨릭문인회
저 자 양지미 유스티나 ● 시인
가톨릭마산 발행호수 2241
발행일자 2017-02-19

한 시절을 풍미했던 은발의 노배우가 TV에 나와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다. 젊은 시절 그의 인기는 엄청났다. 거기다 자주 구설수에 올라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평생을 화제의 인물로 산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인터뷰하는 걸 유심히 보자니 입술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 눈이 이상한가 싶어 TV 앞으로 바짝 다가가 보았다. 그런데 정말 붉은 입술은 온데간데없고 인중 아래 둥근 구멍에서 말이 나오고 있었다.



“저 사람의 입술은 어디로 갔을까?”
혹시 보았니? / 입술은 사라지고 입만 남은 사람들
두툼했던 첫 키스는 터져버린 입술 때문에 들통이 났고
한동안 긴장으로 부풀어 있었잖아
높다랗게 우르가✽를 세우고 / 설레는 맘으로 빗장을 풀었잖아
기다렸다는 듯 잇속에서 터져 나온 말의
씨앗들
소리 없이 입술을 핥기 시작했잖아
붉어진 씨앗들은 / 선명한 테두리까지 야금야금 갉았잖아
배부른 아이들은 떨어져 나가고 / 쭉정이들은 뱃속에 남아 똑같은 노래를 불러댔잖아
조금씩 배가 부풀어 올라 쓸데없이 수확을 걱정했잖아
아버지 돌아가실 때쯤 거울 속의 귀가 자란다고 하셨잖아
산란에 실패한 입술 조각들 / 뒤늦은 고해성사처럼 찾아와 귓불을 부풀게 한다고 하셨잖아
우르가✽의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 그의 입술 그늘도 지워졌잖아
어느새 귀가 자라고 있었잖아
얼굴을 한껏 부풀리며 울어도 / 입술은 입술로 돌아오지 않았잖아
저기 봐 ! / 우두커니 입술 지워진 사람들


졸시 - 사라진 입술들-



은발의 노배우, 입술이 사라진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멋짐을 유지하려 애쓰는 그를 보다가, 어쩌면 그 사람의 입술은 평생 내뱉은 말과 함께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 나간 건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해 보았다.

어린아이들의 얼굴은 선명하고 예쁘다. 특히 입술은 두툼하고 붉다.
그에 반해 세월이 갈수록 대부분 사람들의 입술 색은 희미해지고 입술선도 사라진다. 내 상상처럼 혹시라도 말이 입을 통해 세상으로 나갈 때 붉은 입술 조각 하나씩 물고 나가서 우리들의 입술이 점점 얇아지는 것이라면, 앞으로는 더욱더 긍정적이고 따뜻한 말을 습관처럼 해야 할 것 같다. 내 입술의 파편들이 바람처럼 세상을 떠돌다가 누군가의 귀를 자라게 한다면 이왕이면 곧고 선명하기를 바라며.


Title
List of Articles
제목 단 체 가톨릭마산 발행호수 저 자 조회 수 발행일자
영혼의 뜨락은 ? file 가톨릭문인회 미디어국 4793
권력의 딜레마 가톨릭문인회 2251,2252 이현숙 아마타 ● 수필가 144 2017-04-30
자연이 보인다 가톨릭문인회 2250 이선향 안젤라 ● 시인 121 2017-04-23
고통과 용서, 그리고 부활 가톨릭문인회 2249 이상숙 안토니아 ● 시인 66 2017-04-16
얼굴을 베풀다 가톨릭문인회 2248 이림 모니카 ● 동화작가 59 2017-04-09
생명의 주인 가톨릭문인회 2247 이덕아 아녜스 ● 소설가 64 2017-04-02
긴 팔과 강한 손 가톨릭문인회 2246 유희선 가타리나 ● 시인 107 2017-03-26
혐오 사회 가톨릭문인회 2245 우무석 스테파노 ● 시인 103 2017-03-19
저녁노을 가톨릭문인회 2244 이규준 바오로 ● 시인 54 2017-03-12
꿈꾸는 삶 가톨릭문인회 2243 오덕애 데레사 ● 시인 79 2017-03-05
주님의 모습으로 가톨릭문인회 2242 오서하 율리아나 ● 시인 72 2017-02-26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 27 Next
/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