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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8 04:28

생명의 주인

조회 수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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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체 가톨릭문인회
저 자 이덕아 아녜스 ● 소설가
가톨릭마산 발행호수 2247
발행일자 2017-04-02
얼마 전, 사순절이 시작되던 첫날 이마에 재를 받으며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들었다. 죽을 것이라는 얘기다.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의 에피그래프에는 무녀 시빌의 얘기가 나온다. 너무 오래 살아 쭈그러들어 항아리에 들어간 그녀. 아이들이 조롱하며 묻는다. 뭘 원하느냐고. 무녀가 대답한다. 죽고 싶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죽음은 낯설고 두렵기까지 하다. 그런데 얼마 전 친정어머니께서 진지한 선언을 하셨다. 여든아홉까지만 사시겠다는 것이다. 말씀대로라면 앞으로 3년 남았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 평소 큰 병이 없으신데다 무엇이든 맛있게 잘 드시기만 하면 건강하시다. 그리고 일 년 365일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우리 자녀들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시는지는 나만 알고 있다. 나는 어머니께서 건강하게 오래도록 우리 곁에 계셨으면 한다. 여든아홉 운운하신 건 아마도 혼자 계시는 시간이 많아 외로워서 푸념처럼 하신 얘기일 수도 있다.
학창시절 나도 비슷한 결심을 했었다. 중학교 1학년이던 14살 되던 해였다. 앞으로 딱 19년만 더 살 거라는 거였다. 공교롭게도 예수님이 돌아가신 나이라서 쑥스럽긴 해도 계획을 조절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학원을 가서 박사님도 되고 유학을 하고, 단기간 사회봉사도 하고 그러고 나서 죽겠다고 계획한 것이다. 결혼은 빠져있었다. 거긴 이유가 있었다. 내 첫사랑은 우리 동네의 건달 청년이었다. 난 그를 짝사랑했다. 하지만 나이 차이도 많고 그에겐 이미 연인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날 선택할 리 없다는 자격지심이 컸다. 계획과는 상관없이 시간이 흘러 33살이 다가오자 불안했다. 정말 죽으면 어떻게 하지? 난 죽고 싶지 않았다. 박사님도 못되고 유학도 못 갔으니 안 죽어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를 해보았지만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도 불쑥 찾아오는 죽음에의 공포에 시달렸다. 당시 일을 떠올리면 헛웃음이 나온다.
어머니는 노인정에 가셔서도 89살에 죽겠노라 공공연히 말씀하셨다고 했다. 열흘 만에 다시 만나 마주 보고 밥을 먹으며 말씀드렸다. 죽고 살고 복을 받고 화를 입는 일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성경에 나오는 부자의 얘기도 했다. 곳간을 가득 채워놓고 앞으로 평안히 살겠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죽기 싫어도 어쩔 수 없다고. 그러니 살고 죽는 문제는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열심히 즐겁게 살면 된다고. 어머니는 맞는 말이라고 하시며 한발 뒤로 물러나신다. 그러면서 오래 살면 자식들한테 짐이 되는데…라며 말끝을 흐리신다. 나는 부정의 뜻으로 어머니의 손을 꼭 쥐고 흔들며 우리 모녀의 애창곡인 성가 515번을 부르기 시작한다. 주여!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 생애 즐겁고 기쁘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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